계시록의 붉은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로새서 3:15).

이 한 구절의 말씀에는 엄청난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육체를 지배하고 다스리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온몸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그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평안은 모든 것을 다스리는 주권자로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도록 되어있습니다. 이러한 부르심을 들어야 할 때가 있다면 그 때는 바로 혼란과 혼동의 시간가운데 있는 오늘이 바로 그 때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 4절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고 전 세계를 달리는 붉은 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계시록 6:4).

붉은 말을 탄 자는 바로 지금 모든 평화를 제하고 피묻은 칼을 휘두르며 전 세계를 질주하고 있습니다. 그는 구 소련을 질주하며 모든 평화를 휩쓸어 갔습니다.

몇 년 전 우리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공산주의 제국의 완전한 붕괴를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붉은 말은 계속 질주하고 있으며 민족전쟁, 소요, 투쟁, 혼란, 혼동이 계속 존재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조지아 주에서 전쟁을 지지하는 파에게 동정심이란 없었습니다. 세대의 민간인 항공기가 격추되어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 갔습니다.

유고슬라비아는 더욱 그러합니다!

붉은 말은 평화로왔던 나라를 질주하며 그 땅을 민족전쟁과 분쟁의 격렬한 지옥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보스니아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들은 나뉘어져 미움과 두려움과 유혈의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들은 수천명 단위로 살인하고 강간하며 양심의 가책 같은 것도 느끼지 않습니다.

평화는 남아프리카에서, 서아프리카에서, 소말리아, 한국, 아일랜드 그리고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나라들 가운데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붉은 말은 이러한 국가들을 질주하며 평화를 낚아채어 전쟁밖에는 남겨놓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치심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 뿐이로다"(예레미야 8:15).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모든 것은 계시록 6장 4절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붉은 말이 풀려나 그가 질주하는 곳마다 민족적인 증오심 즉 인종 전쟁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아일랜드에서는 카톨릭이 기독교를,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인들을, 회교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백인들은 흑인들을, 흑인들은 아시아인들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수십년동안 평화로운 가운데 살아온 민족들이 지금 극심한 증오와 살인을 분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폭력과 유혈의 시대를 보며 살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저를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미국인들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미국을 "평화의 섬"으로 보며 이러한 시대에 너무 점쟎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평화를 앗아가시려고 미국에 오시지는 않을거야!"

미국이 이 불안한 세상에서 평화의 안식처와 같은 곳이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의 해안은 어떤 나라의 군대도 다다를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전세계의 사람들이 자신의 돈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이곳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은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지난 한해 나는 붉은 말의 콧김과 발굽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미국해안을 향해 바람을 타고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붉은 말은 우리의 도시들을 질주하며 지나가는 곳마다 모든 평화와 질서를 빼앗으려 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떤 권위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이사야 48:22).

가장 자유주의적인 사람들조차 지금 미국은 사악하고 경건치 못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아무도 우리 사회의 해결책을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지금 요한계시록의 붉은 말이 질주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평안은 영원히 빼앗길 것이며 피묻은 칼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입니다. 증오와 살인의 영이 그 자리를 인계받을 것입니다. 도시는 화염에 휩싸이며 권총이 불을 뿜고 폭동과 유혈사태가 거리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미국은 피비린내나는 전쟁지역이 될 것입니다!

나는 몇 년전에 앞으로 1000개가 넘는 불꽃이 뉴욕을 화염에 휩싸이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오늘날 저의 집 아파트 창문을 통해 이 도시를 내다볼 때마다 내 마음의 눈에는 그 불꽃들이 보입니다. 나는 연기 냄새를 맡으며 붉은 말이 질주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얘기는 전혀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둠과 파멸"의 이야기는 더 이상 원하지 않아요. 그것은 너무나 놀랍고 두려워요. 차라리 다시 TV앞에 앉아서 아무 방해를 받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폭동과 혼란은 정확히 성경이 우리에게 준비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바입니다!

삶에 대한 우리의 조망이 완전히 새로워지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모든 평화를 빼앗긴 민족들에게는 항상 과감한 변화가 뒤따릅니다.

1990년대 초반에 유고슬라비아의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하면 관광수입을 증가시키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나라는 수년간 뒤쳐진 것을 극복하고 생산과 무역의 증가와 더불어 21세기로의 진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관광객들은 그곳의 많은 평화롭고 기묘한 해안 휴양지를 방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유고에는 살육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거리에서 매일 끔직한 살인과 강간, 학살이 일어나고 있다는 보고가 매일 들려옵니다.

유고의 모든 것이 변화되었습니다. 그곳의 사람들은 더 이상 공장을 짓거나, 관광수입을 늘리거나, 은퇴후의 생활이나 집을 고치는 일 등에는 집중하지 않습니다. 하룻밤새 갑자기 그 나라는 혼돈 가운데 빠져들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생존을 생각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어디에서 내일 먹을 양식을 찾을까, 저격병에게 총을 맞지 않고 어떻게 네 블록 떨어져 있는 곳에 가서 물을 가져올까, 아내나 딸이 야만인처럼 강간당하지 않고 어떻게 일주일을 살아갈까' 등등 말입니다. 그들의 모든 사고방식은 변화되었습니다. 모든 평화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곧 그리스도인들은 부부간의 차이, 어느 치과의사에게 갈 것인가, 아이들을 어느 학교를 보낼 것인가, 신용카드 증서, 헤어스타일, 쇼핑센타, 휴가 등과 같은 생각은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대신 우리는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학살로부터 내 아이를 살리기 위해 어디로 보내야 할 것인가? 어떤 미친 사람이 우리집을 태우러 오고 있지는 않은가? 일주일동안 먹을 양식이 충분히 있는가? 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하지요?'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정신이나 자아, 사치, 우울함 등에 몰두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제게 은혜를 주셔서 이번 주에는 제 아이와 그 아이가 일으키는 문제를 참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지 생존만을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는 나라가 완전히 붕괴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미국은 이미 남북전쟁을 경험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그 전쟁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전쟁은 남과 북이 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전쟁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 전쟁은 남북전쟁이 발발했던 게티스버그와 같은 조용한 곳을 무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한가운데에서 즉 뉴욕, 마이애미, 시카고, LA, 보스톤, 휴스톤, 달라스, 디트로이트, 세인트 루이스, 샌프란시스코, 덴버와 같은 주요 도시들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학살과 유혈은 우리의 상상을 넘는 것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소동이 우리에게 닥친다 할지라도 나는 여러분에게 한가지 사실을 확인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을 평안으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붉은 말과 말탄 자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두신 평안을 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로새서 3:15).

왜 주님은 초대교회에게 주님의 평안이 그들의 삶을 다스리게 하라고 명령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무엇이 올 것인지를 알고 계셨으며 교회가 그것을 준비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몇 년 후면 놀라운 환란이 그들에게 갑자기 닥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고문과 박해를 당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힘든 시대, 집과 모든 재산을 잃고 그들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악한 자들로부터의 공격에 직면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경고하며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너희들은 나의 평안가운데 거해야 할 것이다. 나의 평안만이 앞으로 닥칠 모든 놀라운 변화가운데 끝까지 너희들을 지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빌립보서 4:9).

바로 지금 미국에는 거짓 평화가 교회를 휩쓸고 있습니다. 앞으로 닥칠 환란의 때에 사라질 평안 말입니다. 그것은 완고하며, 죄로 어두워진 그리스도인들의 거짓 평안입니다. 모세는 그런 신자들을 "자복하는(self-blessed)" 즉 스스로 속임을 당하는(self-deceived) 자라 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악한 자들, 우상숭배를 행한 불순종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이스라엘에 경고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그들의 죄악된 행동위에 거짓 평안의 마음을 잔뜩 바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신명기 28:19).

모세는 여기서 악을 위하여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키기로 결심한 하나님의 자녀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괜챦을 거야, 그래도 구원받을거야라고 이야기하며 천국을 향하면서도 죄가운데 탐닉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안락한 교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나는 내가 하고싶은대로 하겠어 그래도 내 마음은 평안을 잃지 않을거야"

얼마전 나는 하나님께 헌신된 한 여성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위해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청소년 담당 목사가 죄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담임목사님은 그 목사의 해임안을 거절했습니다. 부모들은 담임목사님께 그 젊은 부목사가 자신의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담임목사는 거절했습니다. 게다가 원로 목사님은 교회안에 불순한 변화를 들여왔습니다. 그는 교회가 "이방의 것들에 우호적"이 되도록 했습니다. 그 교회는 지금 무도회, 서부스타일의 저녁 파티, 그리고 사람들을 끌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종류의 행사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그는 심지어 그리스도인으로서 너무 심각하지 말라고 설교했습니다. "지금은 웃을 때입니다! 좋은 성적을 받으려고 열심히 공부하지 마십시오. 때때로 수업도 빼먹으십시오. 때때로 규칙을 위반하십시오!"

이 목사는 여러분이 결단코 구원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신학을 가르칩니다. '여러분이 어떤 짓을 하든, 여러분은 구원받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성인용 포르노 영화관을 다니며 그것들을 성도들에게 추천합니다. 그는 사람들의 죄에 회칠을 하며 "여러분은 안전합니다"라고 확신시킵니다. 집사들도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토요일 저녁에는 그룹섹스를 하고도 일요일 아침이면 헌금을 들고 "모든 것이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목자는 그의 양들을 죄에 눈멀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거짓 평안을 퍼뜨리며 젊은이들로 하여금 '우리도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고, 잠자리를 같이 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을 저주 하며 잠들도록 어르고 있습니다.

붉은 말이 전미국을 질주할 때, 우리의 도시가 불꽃에 휩싸이며, 인종 폭동이 일어나고, 연방군과 탱크가 우리의 거리에서 달릴 때 모든 거짓 희망은 연기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거짓 희망이 그때에도 여전히 희망으로 남아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날 활동하는 모든 거짓 예언자들은 숨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텔레비젼에 나와 "저에게 백 달러를 기부해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소리에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사람들은 그러한 어리석음에 화가 나서 텔레비젼을 때려 부술 것입니다.

강대상에 서서 "평화와 안녕"을 설교하던 자들은 그들의 교회가 해체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회중 가운데서 일어나서 외칠 것입니다. "목사님, 어떻게 된거죠? 목사님께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설교하지 않으셨쟎아요. 성경에는 어떻게 나와 있나요?" 그러나 그도 역시 모를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에게 반항하며 외칠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오늘날, 전 세계는 러시아를 바라볼 때에 그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곧 세계는 미국을 바라보며 듣고 보는 일들을 믿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믿지 못할 큰 일을 행하겠다. 그 일들은 사람들의 귀를 울리게 할 것이다. 그들은 물러서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지?'라고 말할 것이다"

벌써부터 유럽의 전언은 "미국에 가지 마십시오. 미국에 가면 살인될 것입니다!"라는 것입니다. 베를린의 한 신문 머릿기사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피비린내나는 아메리카!"

런던 썬지의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폭력의 땅! 살인자 미국!" 모든 충격적인 혼동 때문에 사람들은 외칠 것입니다. "이제 평화는 어디있지? 안전한 곳은 어디지? 미국이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었어. 이제 평화로운 곳을 어디서 찾지?"

그러나 평화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세계에 "멸망이 홀연히"(데살로니가전서 5:3) 닥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환란의 때에 주님의 평안이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게 한다는 뜻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6-7).

제가 최근에 이 말씀을 다시 읽었을 때, 전에 전혀 알아보지 못했던 무엇인가가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걱정을 그치고 기도와 간구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며 응답해 주신 것에 감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응답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인도의 말씀이나 구원, 기적, 치유 등을 받는 것에 관해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우리는 하나의 선물,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하는 선물을 받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요청과 간구에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선물로 응답하십니다.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6-7절).

다시 말하면 우리의 모든 기도와 마음의 외침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응답은 그분의 평강입니다. 모든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기도의 골방에 들어갈 때 아무리 기분이 좋지 않았더라도 나올 때는 하나님의 평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의 통치 원리에 따라 이루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곳 저곳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고 여러 가지 사건들을 조화시키는 일들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섭리가 여러분의 기도응답을 이룰 때까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필요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주지 않고 내가 너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을 줄터인데, 그것은 생각과 마음의 평강이다."

대부분의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많은 기도에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고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들은 열렬하고 뜨겁게 금식하고 울며 단 몇 달이 아니라 수년간을 기도하고서도 아직도 응답을 받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여 평안히 기다립니다.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응답하실 것이라는 것 말입니다.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이 기도가운데 주님과 씨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울부짖음과 눈물로 간청하고 천국문을 두드리며 모든 약속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여러 주가 지나가고 몇 달이 지나가면 우리는 의아해하기 시작합니다. "주님, 왜 응답하시지 않지요? 저의 기도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주님을 슬프게 하거나 언ㅉ게 해 드린 일이 있습니까?"

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모든 지각에 뛰어난 나의 평안이 있다. 이 평안을 취하라. 내가 너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는 동안 이 평안이 너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라!" 우리는 주님의 약속이 성령에 의해 다 이루어 질 때까지 하나님의 평강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의의 거하는 바 새하늘과 새땅"을 약속해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베드로후서 3:13).

여러분은 새하늘과 새땅이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실까요? 그렇습니다. 반드시 그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새하늘과 새땅은 아직 이곳에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우리는 평강가운데 조용히 기다리며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14절).

종종 우리는 외칩니다. "오 주님,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의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을 것이라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실 때까지 저는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잔잔하고 조용한 그 음성이 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호세아서는 우리에게 이 예화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저희(에브라임)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호세아 11:3). 이 구절에서 에브라임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나의 백성에게 응답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그들의 외침을 듣고 그들에게 나의 평안을 주었다."

사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기도의 골방을 낙심과 목마름의 장소로 내버려 둘 핑계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저는 열심히 기도했어요. 저는 준비되어 있었고 마음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듣지 못했어요!"라고 이야기할 지도 모릅니다. 아니오,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한복음 14:27)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평안을 누리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 평안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스스로 그 평안을 탕진한 것입니다.

주님의 평안을 붙드시고 그 평안이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고 다스리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평안이 여러분의 삶을 다스리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시는지 알아내려고 하는 모든 수고를 그쳐야 합니다.
  • 걱정과 초초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빌립보서 4:6).
  • 여러분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께 열거하기를 그쳐야 합니다.
  •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실패자라는 생각을 버려야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평안을 빼앗는 사탄의 가장 효과적인 덫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육적인 수고를 해야만 한다고 확신시키는 것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제게 이러한 생각을 떠올립니다.

종종 기도하기 위해 조용한 장소가 필요할 때 저는 약 두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펜실베니아의 언덕으로 차를 몰고 갑니다. 얼마 전에 저는 그곳에 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임재를 즐기며, 푸른 초원과 숲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득 '내가 주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의 나라를 위해 많은 것을 성취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기도하고 설교할 말씀을 받고 교회에 가서 설교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전 세계는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나 나는 당신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위와 같은 생각이 든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을 아는대로 다 행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거룩하다고 느끼지 못하십니까? 저는 그랬습니다. 사실 저는 제 자신이 거룩하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저의 가장 좋은 시간, 성령의 기름부으심 아래 설교하고 있을 때에 조차도 그러한 느낌은 계속됩니다.

"데이빗 형제님, 당신이 때때로 하나님을 위해서 많은 것을 하지 않고 있다고 느낀다구요?"라고 여러분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이 들어와서 우리 모두가 가치없고 이룬 것없는 존재인 것처럼 느끼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나쁜 감정에 굴복함으로서 우리의 평안을 잃습니다.

우리를 위한 바울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로마서15:13).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동안 여러분은 소망, 기쁨 그리고 평안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소망, 기쁨, 평안으로 가득찬 이 길을 걷고 싶습니다. 저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계속해서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하지요?" 저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단지 심판의 주로만 보고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그분을 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평강이 완전히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그분이 갈망하는 바를 말씀가운데 우리에게 말해주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유모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서에서 자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지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호세아 11:3).

이 구절의 히브리 원본을 번역해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절망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더럽고 누추한 곳에서도 친절하게 돌보아 주었다. 나는 유모로서 그들을 내 팔에 안아주었다. "그러나 성경은 에브라임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호세아 11:7)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결심하고"란 말은 "마음을 졸이고 있음, 의심가운데 머뭄"이라는 뜻입니다.

에브라임은 주님의 사랑과 친절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의 백성이 그들을 향한 나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다. 그들은 진정 나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나의 성품을 모른다. 그들은 나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였고, 뒤돌아 선 자, 의심하는 자들이었고 모든 종류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우리는 하나님의 화를 자초했어. 우리는 마음대로 죄를 저질렀지. 틀림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고 그분의 분노를 우리 모두에게 내리실거야!"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8절).

얼마나 놀라운 사랑과 자비입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어떻게 너를 포기하겠느냐? 그래, 내가 너에게 화가 난 적은 있었다. 그래 너희들은 내게 불순종하였고 때때로 나를 슬프게 하였다. 그럼에도 너희들은 나의 자녀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결코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분의 마음을 여러분을 그리워하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두루 살피시며 유모처럼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주시는 위로와 치료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이사야 57:16).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네게 화내지 않을 것이다. 만약 네가 내게서 발견하는 것이 분노뿐이라면 너의 영혼은 너무나 곤할 것이다. 너희는 그것을 처리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강력할 것이다. 너희는 포기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17절).

"나는 너의 타락에 화가 났다. 나는 나의 노를 너에게 드러내었다. 그러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너는 단지 너의 길을 계속 고집하며 나의 경고를 무시하고 나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서 나를 가리웠다!"

"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18절).

"나는 너의 마음을 안다. 나는 너의 모든 타락을 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너의 죄로 인한 너의 탄식과 나를 향한 너의 그리움과 갈망도 안다. 비록 네가 타락하였으나 너는 내게서 돌아서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너를 고쳐주겠다! 나는 너의 영혼에 위로를 회복시키겠다. 나는 다시한번 너를 인도하고 안내하겠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타락할 때 여러분을 포기하시는 것처럼 들리십니까?

아니고,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잠시동안 여러분에게서 자신을 가리우실 지도 모릅니다. 잠시동안 그분의 노를 드러내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사랑의 끈으로 너희들을 다시 데려오겠다. 너의 멍에, 너의 짐을 내려놓아라. 나는 너를 치료하기 원한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호세아 11:4)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바로 지금 깊은 물속과 같은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반드시 여러분의 죄나 유혹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는 강력하게 여러분을 몰아 부치고 있는 사건들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갖가지 바람과 풍랑,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여러분을 덮치고 있습니다. 가정, 교회, 직장 사방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 모든 것 가운데로 통과시키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다시 영적으로 건강한 상태로 돌아가도록 돌보기 원하십니다. 바로 지금 여러분이 모든 완고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여러분이 주님을 하늘이 내린 유모로 보기를 주님이 간청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됐습니다.

주님의 선하심을 믿으십시오.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믿으십시오. 더 이상 주님이 여러분에게 화가 났다거나 여러분에게 말씀하지 않으신다고 주님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그분께 돌아서서 말하십시오. "주님, 주님은 저의 유모십니다. 나를 사로잡아 주십시오!" 그분의 평안이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전 생애를 주장하도록 하십시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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