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몸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27). 나아가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14).
바울이 근본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바는 이것입니다. "당신의 몸을 보십시오. 손과 발, 귀와 눈이 있습니다. 뇌가 몸의 다른 부분과 분리된다면 그것은 당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일 수만은 없습니다. 그에게는 몸이 있고 우리가 바로 그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로마서 12:5).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는 머리 되신 예수님께만 붙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시에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 된 자들과 붙어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만 붙어 있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바울은 이 점을 가르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고린도전서 10:16-17). 간단히 말해서 우리 모두는 같은 양식,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만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6:33).
예수님은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한복음 6:35, 51: 57:). 여기서 떡의 형상, 이미지가 중요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네가 내게로 온다면 온전한 영양을 공급 받게 될 것이다. 내 몸의 지체로서 접붙임을 입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내 안에 있는 생수의 강으로부터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진실로 주님의 몸의 지체 하나 하나는 단 하나의 원천에서 힘을 얻습니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가 바로 그 원천입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구별해 주는 것이 바로 이 떡입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구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유일한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를 먹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고린도전서 10:17).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몸의 다른 지체와 붙어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교제합니다. 그러나 다른 성도들로부터 일부러 자신을 격리시킵니다. 그들은 머리 외에는 어떤 몸과도 연관을 맺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몸은 하나의 지체로만 구성될 수 없습니다. 팔 하나만 가지고 있는 머리를 상상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은 팔 다리, 다른 기관이 없이 머리로만 구성될 수 없습니다. 그의 몸은 많은 지체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되지 않고는 그리스도와 하나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머리만이 아닙니다. 몸 전체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필요 뿐 아니라 서로에 대한 필요로 묶여 있습니다. 바울은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 주장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21).
이 구절의 후반부를 주목하십시오. 머리조차도 다른 지체에게 "난 네가 필요 없어"라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결코 몸의 어느 지체에게도 ‘나는 네가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는 기꺼이 자신을 우리 지체 하나 하나에 접붙이십니다. 게다가 그분은 우리 모두가 중요하다고, 나아가 그분의 몸의 기능이 작용하는데 우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실은 특별히 상처를 입거나 다친 지체에게도 해당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고린도전서 12:22). 바울 사도는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라고 말을 잇고 있습니다 (12:23). 그는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보이지 않고, 감추어진 알려지지 않은 지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이 지체들에게는 영화로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움직이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 모두에게 심오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아인식이 아무리 형편없더라도 괜찮습니다. 아마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필요하단다. 너는 내 몸의 중요한 지체일 뿐 아니라 몸이 제대로 기능 하는데 필수적이고 필요한 존재란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몸에 대해 많은 진리를 밝혀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감추어진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 비밀은 창조 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 나누고 계셨던 것입니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마태복음 13:35). 예수님은 이 감추어진 진리가 진리를 찾고자 시간을 들여 애쓰는 자들에게만 드러날 것이라고 증거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우리는 제가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고 믿는 비유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시는 주님의 영원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전체적으로 드러내고 계십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은 아들을 위한 신부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신부는 주님과 한 육신, 한 몸으로서 연결되어 있는 관계, 즉 예수님과 연합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신부의 근원이자 생명 자체가 되실 것입니다. 주님은 신부에게, 신부는 주님께 연합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로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마태복음 22:1-3). 이 비유에서 왕은 분명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아들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어 아들을 위한 신부를 찾으라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부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신부는 많은 지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실, 이 신부는 혼인 잔치로의 왕의 초대를 수락한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다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기를 싫어하거늘" (22;3). 예수님은 여기서 유대인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설교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라고 촉구하셨지만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한복음 1:11).
그래서 왕은 다시 한번 시도했습니다.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마태복음 22:4-6).
유대인들은 예수님 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사도들까지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22:7).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겨우 몇 십년이 지나지 않아 로마의 군대가 진군해 들어와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하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앗수르(앗시리아)를 사용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로마의 장군 바스피안과 티투스를 보내셔서 예루살렘을 잿더미가 되도록 태우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예언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23:38).
천국 비유에서 다음 구절은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저의 설교에서 핵심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22:8-10).
갈보리 십자가 사건 이래로 복음은 모든 인류에게 퍼져 나갔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종이나 자유인,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에게 똑같이 전파되었습니다. 이것이 "혼인 자리에 손님이 가득"하게 된 방법입니다(22:10). 이 장면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아니라는 점을 잘 알아두십시오. 그 잔치는 심판 후에 있을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의 잔치는 약혼 잔치입니다. 그리고 손님들은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라는 초청에 응한 자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 신부는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온" 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2:10). 이런 사람들의 모임은 마약 중독자, 알코올 중독자, 창녀, 살인자, 도박꾼, 마약 중개인 등 이전에 악인에 속했던 자들을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전에 선한 사람의 부류에 속했던 자들, 한때 육의 의를 의지했던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 모두는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김을 받았습니다. 매주 수많은 군중들이 부르는 찬송처럼 그들은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라고 증거 합니다 (아가 2:4).
엄청난 무리가 주님의 잔칫상에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잔치가 손님으로 "가득했다"고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희랍 원어는 플레토(pletho)라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불어넣다, 채우다, 영향을 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손님들은 그리스도의 구속된 몸, 정결케 된 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영향 아래 채움을 받고 성령에 감화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흰 혼인 예복을 입히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결혼 예식과 혼인 잔치가 몇 시간 만에 끝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던 시절 유대인의 문화에서 혼인 잔치는 7일간 지속되었습니다. 하나님께 하루는 천년과 같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가 보고있는 혼인잔치는 갈보리에서 시작되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수십 세기를 지속되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의 하루 하루 매일 매일이 여러분의 결혼식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여러분은 주님의 신부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매일 아침 일어날 때 여러분이 흰 혼인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그 옷이 얼룩지거나 더럽혀 진다면 주님의 말씀 앞으로 그 예복을 가져가 깨끗하게 씻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여러분은 언제나 혼인 반지를 끼고 있어야 합니다. 혼인 반지는 여러분이 성령에 의해 인침을 받은 혼인 상태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의 만나인 그리스도, 하늘의 떡을 먹으며 혼인 잔치를 즐겨야 합니다.
이 혼인 잔치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매일 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불청객이 잔치 석상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태복음 22:11-13).
이 비유에 나오는 이 불청객은 누구이겠습니까? 그 사람의 정체는 그가 겪어야 할 끔찍한 운명을 생각해 볼 때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사람이 ‘자기의 (self-righteousness)’ 라고 하는 누더기 옷을 걸치고 그리스도께 나온 자들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의지함으로 인해 심판을 받는 불쌍한, 미혹된, 덥수룩하고 지친 영혼의 형상을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러한 해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제가 믿고있는 바를 말씀 드리면 여러분은 아마 충격을 받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왕이 그를 "친구"라고 부르는데서 그의 정체성에 대한 단서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기 전 유다에게도 똑 같은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저는 이 비유에서 왕이 "친구"라는 단어를 조롱조로 사용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결국 왕은 그를 지옥으로 보낼 예정이었으니까요.
제 견해로는 이 불청객은 죄의 사람, 사탄입니다. 저는 그가 신부에게 요구되는 흰옷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화려한 자줏빛 옷을 입고 혼인잔치에 우쭐대며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는 교만의 형상 그 자체입니다.
만약 그가 사탄이라면 어떻게 혼인잔치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요?
불법과 죄악의 사람인 사탄이 혼인잔치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왜 입구에서 막지 않았을까요? 저는 스가랴가 우리에게 해답을 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스가랴 3:1-2).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으로, 여호와께 구원을 받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여호수아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스가랴는 사탄이 여호수아 곁에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대적한다는 단어는 공격, 비난, 고소, 참소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한가지 솔직히 고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는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참소하고 공격할 권리를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분명히 아는 것은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원수에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10). 어느 날 주님은 마귀를 묶어 영원한 감옥에 던져 가두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편 사탄은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엄청난 분노로 그리스도의 몸을 대적해 오고 있습니다. 진실로 사탄의 공격은 예전에 없던 대담함과 뻔뻔함으로 더욱 드러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는 자신에게 가장 큰 위협이 보혈의 피로 깨끗함을 입은, 주님 안에 연합한 하나된 성도의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시대에 성령께서는 전세계에 걸쳐 성도들을 일으키시고 연합 시키시는 놀라운 역사를 수행해 오고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헌신 된 종들은 한 몸처럼 연합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그들 가운데 아픈 자와 낙심한 자들을 섬깁니다. 그들은 영적 전쟁 중에도 하나되어 단결을 유지합니다. 그들은 대적과 전투를 벌이고, 원수의 나라를 묶으며, 사탄의 정사를 몰아내고 지옥의 힘을 통치할 권세를 취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혼인 잔치 비유에서 이러한 마지막 시대의 군대가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혈의 피로 깨끗함을 입은 전사들이 그리스도의 잔칫상에 모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주님의 떡을 나누고 먹고 즐김으로써 강건해집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한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신랑이 오실 때 그분을 맞이할 완전한 준비를 하는 것이 그 목표입니다.
우리는 사탄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전혀 놀라서는 안됩니다. 사탄에게는 이것이 성장하고 성숙해져 가는 그리스도의 몸을 분쇄할 마지막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미친 듯이 결혼식에 들어와서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을 파괴할 기회를 노립니다. 그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을 속이는 것이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최선의 방법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요? 그는 갈보리 십자가 사건 이래로 항상 해오던 일을 지속할 뿐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속삭입니다. 우리를 정죄하고 참소합니다. 의심과 두려움을 우리의 마음 속에 주입합니다. 자줏빛 옷을 입은 이가 잔칫상마다 돌아다니면서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을 속이려고 하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의심과 두려움을 그들 가운데 심습니다. 교묘히 그들을 참소하며 그들의 흰옷을 더럽히려 애씁니다.
죄의 사람은 특별히 한 부류의 성도를 목표로 삼습니다.
저는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의 전략을 이해하는 열쇠를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마귀는 막 이브를 유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세기 3:15).
여기서 여자의 후손이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아가 인류에게서 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루실 예수님의 승리의 역사를 예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갈보리에서 그리스도가 그의 발로 사탄의 머리를 짓밟아 상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한 사탄이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도 주셨습니다. 이 말의 뜻이 정확히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후손입니다. 이 후손 중 일부가 그리스도의 몸에서 발꿈치가 될 것은 분명합니다. 어떤 자들이 발꿈치에 해당할까요?
우리에게 해답을 찾을 만한 몇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먼저 발꿈치는 발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발의 주된 역할이 서거나 걷는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발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서는 자들, 그리스도의 편에 서는 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몸의 다른 부분들은 잘 드러나지만 그들은 대부분 감추어져 있고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발은 그리스도의 몸의 다른 지체들에게 본이 됩니다.
그러나 발은 또한 가장 민감한 부분입니다. 발은 대부분 보호를 위해 덮여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상하게 하다"는 히브리어의 의미는 자명합니다. 그 뜻은 ‘속이다, 걸려 넘어뜨리기 위해 기다리다’ 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저는 사탄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중 민감하고 쉽게 상처 받는 자들을 목표로 한다고 믿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아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종종 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갈망합니다. 하지만 자신은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은 의심합니다. 그들은 아무도 자기를 필요로 하지 않고 또 자신이 쓰임 받을 수도 없다고 생각하며 쉽게 정죄감에 빠지고,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라고 느낍니다.
이들의 삶을 꾸준히 관찰해왔기 때문에 사탄은 그들의 이런 면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탄이 왕의 혼인잔치에 들어가자 공격할 준비를 완전히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는 잔칫상을 돌아다니며 참소의 말을 그들의 귀에 속삭입니다. 사탄의 목표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유약한 마음을 가진 성도들로 하여금 포기하도록 확신 시키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들이 흰옷을 벗어 던지고 완전한 절망 가운데 혼인잔치에서 떠나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 "너는 순결하고 거룩해 보이지만 너의 마음은 죄로 어두워. 너는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말거야. 너는 쓸모없는 위선자에 불과해."
-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너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아. 너는 은사가 없잖아. 너는 그저 그런 존재일 뿐이야.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아."
- "옛날부터 가지고 있던 너의 그 죄가 너를 사로잡고야 말거야. 너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욕되게 만들 거야. 너의 좋은 평판도 끝내는 허물어지겠지."
- "하나님께서 너에게 주셨다고 믿는 말씀들은 잊어버려. 내가 널 속인 거야. 네가 들었던 그 목소리는 나였어."
- "하나님은 너에게 화나셨어. 그래서 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거야. 너는 너무 자주 죄를 짓잖아. 안그래?"
- "넌 아마 직장을 잃게 될 걸. 결국 엄청난 가난에 시달리게 되겠지."
- "넌 해낼 수 없어. 사태가 해결 되기 전에 넌 끝장 나 있을 거야."
밤낮으로 우리는 이러한 참소의 소리를 듣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사탄이 원하는 유일한 것은 여러분을 혼인잔치에서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양분이 부족해서 굶주리도록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고립시키기 원합니다. 그러면 사탄은 우리의 영혼을 가둘 수 있을 테니까요. 그는 우리를 확신 시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너는 결코 그 수준에 못 올라가. 계속 해봐야 무슨 소용 있어? 너는 절대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의 지체가 될 수 없어." 하지만 사실상 사탄은 자신의 최대의 적이 성도들의 연합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탄은 두 세 사람이 모인 곳 어디에서나 아버지께서 즐거이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그토록 우리를 하나씩 떼어 놓기에 절박하고 단호한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왕은 죄의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을 죽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왕은 마침내 사탄과 마주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혼인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지?" 이 말은 실상 이렇게 묻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여기서 내 백성을 괴롭히다니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내가 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나? 내가 너를 상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사탄이 거짓말로 여러분에게 처음 속삭였을 때부터 하나님은 그의 행동 하나 하나를 다 보고 계셨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마귀의 거짓말을 잠잠케 하고자 거동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성경은 왕이 그 환영 받지 못한 자의 말문이 막히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2:12). 하나님께서 "사탄아, 더 이상 나의 잔치에서 참소하지 말라. 내 백성에게 더 이상 너의 거짓말을 내뱉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왕은 그의 종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22:13).
마지막으로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은 왕의 말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 저는 하나님께서 잔치를 지켜보시면서 "여러 해 동안 나는 나의 사도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외쳤다. 하지만 그들은 듣기를 거부했다. 이제 여기 내 집의 이 손님들은 나의 초대에 응답했다. 이들은 택함을 입었다. 그래서 나는 사탄이 나의 몸에서 이들 중 아무라도 떼어내도록 놔두지 않겠다"고 선언하시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우리는 마귀가 아직은 영원한 감옥에 던져지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잔치를 즐기고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명령을 하나 받았습니다. 왕은 우리에게 마귀를 묶어 그를 잔치가 벌어지는 곳 밖으로 내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대상으로 하는 사탄의 공격을 대적하여 일어나 중대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 명령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유약한 성도가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를 위로해 줘야지. 그의 말을 잘 들어주는 자리에 내가 있어야지" 또는 "내가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그에게 음식을 좀 가져다 주고 헌금을 해서 도와 줘야지"라는 생각들을 하곤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진정으로 경건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을 때가 자주 있습니다.
우리가 사탄이 누군가의 삶에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단지 그들의 말을 들어준다거나 조언을 해주는 것 이상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성도들을 모아 우리의 원수를 대적하는 권세를 취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탄의 억압과 압제 중 어떤 종류는 "기도와 금식 외에는 나가지 않는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7:21). 이와 같이 기도와 금식으로 우리는 원수를 묶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체된 성도의 마음과 영혼과 환경으로부터 그 원수를 몰아내야 합니다.
저는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문제로 낙심한 성도들에게 상담해 주는데 수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점점 더 사탄이 그들을 좌우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거짓말을 확신 시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사탄이 다른 민감하거나 유약한 성도를 향해 역사하는 것을 볼 때마다 거룩한 분노가 제 안에서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진정한 목자라면 부름 받은 사명을 이루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사단의 손과 발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묶고 원수를 바깥 어두움으로 쫓아내는 것 말입니다.
여러분, 혹시 절망의 구름에 덮여 살고 있으십니까? 혹 사탄의 참소를 들으며 절망에 빠진 형제나 자매를 알고 있으십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기도하는 성도들을 찾으라고 강력히 촉구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진정으로 아는 자들에게 가십시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사탄이 여러분에게 하는 거짓말이 무엇인지 지적하도록 하십시오.
성경은 우리 중 하나가 다치면 모두가 아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구세주의 권세를 의지하고, 대적을 묶으며, 각 사람의 인생에서 원수를 몰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역사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