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사역 - 주님의 얼굴을 보는 것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직으로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모두)가 이 직분(ministry)을 받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고린도후서 4:1).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직의 개념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성직이란 목사안수를 받은 설교자나 선교사들만이 감당할 수 있는 직책이라고 여깁니다. 우리는 목사들이란 신학교를 졸업한 후 결혼식과 장례식 사회를 보고, 예배를 인도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목사를 아픈 자들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영적의사로 간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식대로 성직을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모두는 사역의 성공 여부를 그 규모나 효과 면에서 평가하고 얼마나 많은 업적을 성취했는가를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 중요한 기준은 얼마나 사역이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 교회가 얼마나 커졌는지,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 했는지가 아닙니다.
물론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사역을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행해 왔습니다. 은사가 넘치는 남종과 여종들이 거대한 예배당을 건립하고, 기독교 기관과 학교를 세우고, 복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똑 같이 넘치는 은사를 가지고도 어떤 이들은 사심을 가지고 사역을 합니다. 간음한 자, 음란한 자, 술 취한 자, 동성애자 등 모두가 자신들의 은사와 명철을 이용해서 교회에서 많은 업적을 이루어 왔습니다.
저는 경건한 업적을 통해서 사역을 세우고 발전시킨 의로운 목사들을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은 우리를 상처받고 곤궁한 자들의 필요를 채우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사역을 무엇인가를 하는 것, 업적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하고 어떤 사람이 되는 것, 어떠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으로 보지 않는데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부르심을 받은 어떤 직분, 사역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이 사역은 어떤 특별한 은사나 달란트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직분은 거듭난 사람이면 목사이든지 평신도이든지 누구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역은 모든 성도들의 첫째가는 소명입니다. 다른 모든 수고와 노력은 이 소명에서부터 흘러나와야 합니다. 어떤 사역도 이 소명으로부터 탄생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사역이란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라고 말하였습니다(고린도후서 3:18).
주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여기서 온 마음을 바친, 헌신된, 초점이 맞추어진 예배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 하나님께만 드려진 시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말을 잇습니다.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고린도후서 4:1) 바울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는 것이 우리 모두가 헌신해야 하는 사역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본다"는 뜻의 희랍어 단어는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그냥 한 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는 이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겠어. 나의 한 가지 목적,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것을 달성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어"라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3:18)는 구절을 오해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이 우리에게 반사되어 비춰지는 거울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는 보다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 마치 거울을 뚫고 볼 정도로 무엇인가를 열정적으로 응시하는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결심하고 우리의 눈을 이처럼 고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집념, 우리가 변화받기 위해 골똘히 응시하는 것, 헌신된 맘으로 교통하는 것을 가지고 지성소에서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만 집중하고 그를 보는 자는 변화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바울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고린도후서 3:18).
여기서 "변한다"는 뜻의 "화하여"라는 단어의 희랍어 원어는 변형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변화, 변형, 변신을 의미합니다. 지성소에 들어가 그 시선을 그리스도께 열정적으로 고정하는 자는 누구든지 변화를 받습니다. 환골탈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는 끊임없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예수님처럼 변화되어 갑니다.
여러분 중에도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자주 나아가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과만 보내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느끼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변화가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변화를 받지 않고는 그 어느 누구도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목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한 말 중 마지막 구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린도후서 3:18 후반).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역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 앞의 구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린도후서 3:17).
여기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바를 아시겠습니까? 그는 우리에게 "너희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때 변화의 자유를 발견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므로 우리는 성령께 우리의 삶을 통치하도록, 성령의 의사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도록 자유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 제 의지는 주님의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저를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십시오"라는 복종의 행위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볼 때 가장 먼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영광에서 멀어져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지, 얼마나 우리의 육으로 무엇인가 이루려고 애쓰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시작할 때 자연스러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의를 이루셨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 결코 어떤 수고를 하거나 땀을 흘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진정으로 우리는 변화 받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우리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변화라고 하는 영광스러운 과정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제 "약속에 의해, 성령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역할은 그저 주님의 임재 가운데 나아가 우리의 눈을 그분께 고정하고 주님의 임재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의 창조자요 완성자이신 주님께 모든 신뢰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영을 통해서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은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공언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을 통치하고 계시는지를 증명할 수 있는 시험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이 여러분 안에서 점점 증가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께서 완전히 통치하고 계시다면 그리스도의 성품이 불쑥 늘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로부터 물러나거나 후퇴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끊임없는 변화가 점점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증가는 단지 울부짖을 때나 시험의 때에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이 이루시는 변화는 영속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에는 정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변화는 주로 우리의 시험과 고난을 통해서 옵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7)고 기록하였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연약한 그릇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성품을 담아 드러낼 수 있을까? 특별히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말이야? 라고 의문을 가지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실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기로 정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모든 고난과 시험은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의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웬과 제가 저희 손녀딸 티파니의 뇌암 발병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우리는 저희 딸 데비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데비가 어떻게 이 일을 견딜까? 그 애는 너무 연약한데라고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나 데비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바위가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녀 안에 드러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데비는 어디서 그런 힘을 발견했을까요? 여러 달 동안 그녀는 Madame Guyon과 Amy Carmichael의 글을 통해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있었습니다. 데비는 그들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제게 말했습니다. 아빠, 저는 예수님을 더욱 알기 원해요.
그녀는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만 여러 달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세상으로까지 넘치도록 비춰지는 변화를 일으키셨습니다. 성령께서 그녀를 변화시켰습니다. 우리 모두는 데비의 남편 로저에게서도 똑 같은 힘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시험을 당하는 내내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 신뢰와 안식은 그들이 행한 강력한 사역이었습니다.
저는 대담한 주장을 하나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고통과 고난, 시험은 사역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여러분을 성직에 앉힐 수 없습니다. 신학교에서 학위를 받을 수는 있습니다. 교단에서 안수를 받을 수도 있고 총회에서 어떤 임무를 부여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진정한 성직으로의 부르심의 유일한 원천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디모데전서 1:12).
예수님께서 자신을 충성되이 여기셔서 능하게 하셨다는 바울의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바울 사도의 회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회심 3일 후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고난의 사역이었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사도행전 9:16).
바울이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라"(고린도후서 4:1)고 말했을 때 그가 언급한 직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습니다. "긍휼하심을 받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고린도후서 4:1). 그는 고난당하는 사역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 모두가 이 직분을 맞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이 사역에 대한 약속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언제나 신실하실 것을 맹세하셨고 그가 겪는 모든 시험가운데 능력을 주실 것을 맹세해주셨던 것입니다. "능력을 준다"는 희랍어 원어는 지속적인 힘의 공급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내게 이 여정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힘을 공급해 주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로 이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 언제나 신실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저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도리어 간증할 것들을 가지고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역에서 일차적인 소명으로 여긴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설득력 있는 설교였습니까? 깊은 가르침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인정했듯이 바울은 달변의 웅변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자신의 연약함을 가지고 설교한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조차 바울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베드로후서 3:15-16).
그러나 이때쯤 바울은 이미 그의 모든 세상적인 지혜와 세상에서 배운 지식들을 내던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역이 설교나, 병났게 함이나, 인간적인 총명함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엄청난 고난을 통해서 자기 안에 만들어진 그리스도를 비추는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닥쳐온 시험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했는지 그 모습으로 인해 자기 시대 뿐 아니라 우리의 세대에까지 여전히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 말이 의도한 바는 "여러분은 앞에 한 인간이 서있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를 커다란 시험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은 제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제게서 보는 광채입니다. 오직 신실하신 능력자만이 인간의 삶에 이것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자기의 종들에게 모든 시험 가운데서도 찬양과 간증을 주실 수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8-10).
바울은 초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절망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는 생존하리라고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어려운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린도후서 1:8-10).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십니까? 그는 우리에게 "우리는 인간적인 힘으로는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억눌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겪은 가장 큰 시련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사망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바울은 자신의 사역과 소명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상기시켰습니다. "온 세상이 나를 보고 있어. 나는 자기 종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많은 설교를 했어. 이제 모든 사람이 내가 그것을 믿는지 보고 있는 거야."
바울은 다시 일어나서 자기 삶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저는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 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를 도운 것은 바로 여러분의 기도였습니다. 여러분이 우리로 하여금 승리의 노래로 모든 시험을 통과할 힘을 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1:11).
이 말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형제, 자매를 위해 기도하는 일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기도가 자신에게 은사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도는 돈이나 위로의 말, 혹은 사랑에서 우러나온 선행보다 훨씬 더 값진 것입니다.
저희 가족은 다른 사람들의 기도에 큰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30 여 일에 걸쳐 저의 손녀딸 티파니는 저희 집에 누워있었습니다. 그것은 저희 가족의 삶 속에서 가장 힘든 시련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간증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했습니다. 갑작스런 불행이 우리에게 닥쳐왔고 우리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시험에 부딪힌 것입니다.
티파니가 마지막 숨을 들이쉬던 마지막 순간 우리는 그녀의 침대를 빙 둘러 그녀의 손을 잡고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성도들의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경험은 우리가 서로 손을 맞잡은 것만큼이나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었던 분들의 기도로 세움을 입었다고 감히 간증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같이 저희는 저희를 위해 기도해 주었던 모든 분들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통해 우리를 너무나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여러분은 가장 힘겨운 시험의 순간에 우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은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험으로 인해 진멸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미친 듯한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는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사역뿐인 때가 이미 도래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디모데후서 4:2)고 편지했을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묘사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디모데후서 4:1-5).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에 홀딱 빠져 바른 교훈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말씀을 선포해라. 책망이 필요하다. 불순종하는 자를 징책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권고해라."
우리는 강력한 설교, 바른 가르침, 경건한 징책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곧 세상은 어떤 것도 듣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류는 쾌락과 욕망에 사로잡혀 교회를 완전히 무시할 것입니다. 설교나 교훈은 중독된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저는 세계적으로 우리가 이미 이 지점에 도달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름뿐인 교회는 완전히 세상과는 별개가 되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교회는 나라뿐만 아니라 심지어 개인에게조차 영향을 미치고 있지 못합니다. 도대체 어떤 사역이 이렇게 미쳐가는 세상에 다가갈 수 있을까요?
아직도 무신론자, 이슬람교도, 각종 불신자들에게 선포하는 사역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삶 속에서 깊고 힘든 고난을 통한 빛나는 그리스도의 광채입니다. 수 세기 동안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였습니다. 성도들은 질병, 박해, 각종 고난으로 흔들림과 꺾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성도들의 사방에 있는 자들을 움직인 것은 그리스도의 빛나는 성품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의 간곡한 권고를 주목해 보십시오.
-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디모데후서 4:5). 바울은 "세상의 불신자들이 너를 보고 있다. 그러므로 네가 고난당할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를 주의해라. 네가 당하는 시험이 너를 믿음 없는 불평이나 슬픔으로 몰아가도록 허락지 말아라. 그러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관해 네가 했던 모든 말들이 신용을 잃게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 "전도인의 일을 하며"(디모데후서 4:5). 제가 젊은 목사였을 때 저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병원 복도를 걷기만 하면 치유가 일어나는 기적이 왜 나타나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큰 증거가 될까. 환자들이 침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다면 의심이 가득한 어떤 자도 확신을 가질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저는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불신자의 입원실에 들어와서 설교를 하고 책망의 말, 바른 교훈을 늘어놓는 미소를 머금은 건강한 그리스도인과 가슴을 양쪽 다 도려내는 유방 절제 수술을 받고 회복실에 누워있는 초라한 그리스도인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큰 영향을 끼치겠습니까? 이 여인은 고통을 느끼지 않고 지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녀는 간호사를 향해 미소를 짓고는 속사람의 평강으로 입원실을 가득 밝힙니다. 가장 냉소적인 불신자인 의사조차도 이 여성의 평안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그 의사는 그녀가 고통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평안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싶어서 그녀에게 다가옵니다.
저는 병원 사역을 경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이 감당해야 하는 거룩한 소명이며 중요한 사역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 손녀 티파니가 죽기 전 마지막 여러 날 동안 저의 가정에서 있었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간병인이 저희 집에 매일 왔었습니다. 그는 우리 손녀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3주 후 그는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 그들이 때때로 우는 것을 보기도 해. 하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평안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게 뭔지 알아야겠어." 이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저 그리스도의 영이 고통 속에 있는 우리 가족에게서 빛나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 "네 직무를 다하라"(디모데후서 4:5). 여기서 직무라는 희랍어 단어의 의미는 완전히 확신한 빈틈없이 준비된 이란 뜻입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핵심은 "네 시험이 갑자기 네게 닥치기 전에 준비하라. 잘 무장하고, 영적 능력으로 가득 채워라. 그러면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시험을 당하는 동안 쓰러지는 것을 봅니다. 힘든 고통이 그들을 낙심의 회오리 가운데로 던져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이 갖는 의문과 제기하는 의문들을 듣다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믿음의 창조자이심을 알았지만 믿음의 완성자이심은 진정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 변화 받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영으로나 성품으로나 퇴보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변화와 변신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변화는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사로잡는 것으로 인해 변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닮아갑니다. 우리의 성품은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의 생활을 생각해 보십시오. 동성애라는 삶의 형태를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그 인격이 점점 타락해 가는 동성애자들을 저는 목격해 왔습니다. 그들의 안색, 목소리, 습관에는 급격한 변화가 생깁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담대함이 계속해서 증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몇 년 전 뉴욕시에 거주하는 약 육칠백 명의 동성애자들이 5번가에서 벌어지는 동성애자 퍼레이드에는 결코 참가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우리의 성 정체성을 볼거리로 만드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그런 일에는 참가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작년 반 누드로 그 퍼레이드를 이끈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포르노그래피로 인해 파생되는 변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남자들은 여성의 누드사진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어린이 포르노의 수렁에까지 빠지게 됩니다. 기혼 남성들은 포르노로는 그들의 정욕을 채울 수 없어서 불륜을 저지릅니다. 한때 그들은 자녀들을 위해 죽겠다고 맹세했지만 지금은 후회나 수치심도 없이 기꺼이 가족을 버릴 마음도 있습니다. 얼마나 이들의 인격이 신속히 붕괴되는지요! 그들은 다른 사람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영적인 것으로 마음과 영혼을 채우는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 종들은 자기 눈을 순결하고 거룩한 것에 고정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눈을 그리스도에만 고정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가장 소중한 시간을 하나님을 경배하고 믿음 가운데 자신을 세우는 일에 사용합니다. 성령께서는 이런 성도들에게 역사하시며 끊임없이 그들의 인격을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이러한 성도들만이 지구상에 닥칠 엄청난, 폭발적인 시험을 맞이할 준비가 될 것입니다. 게으르고,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심장마비나 쇠약증에 시달릴 것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짓눌림을 당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들 안에 역사하셔서 변화시키도록 성령께 자신을 내어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험의 때가 닥치면 그들은 그 시험을 통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지금 불같은 시험을 겪고 계시다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사역가운데 집어넣으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평하거나 흐느끼는 겁쟁이가 되어 여러분에게 주어진 소명을 훼방하거나 더럽히지 마십시오. 이 때를 위해 바울이 한 마지막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린도후서 6:3-5, 10).
어떻게 우리가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시련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소망의 빛을 발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의 비밀이 뭐야? 어떻게 그는 이런 시험을 견딜 수 있지? 어디서 그는 그런 평안을 찾은 거지?"라고 묻게 함으로써 진정한 풍요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여러분의 마음의 준비를 시작하십시오. 예수님만을 독대하고 여러분의 눈을 그분께만 고정함으로 여러분의 창고를 가득 채우십시오. 그러면 어떤 것도 맞닥뜨릴 준비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이 마지막 시대 우리의 사명이요 우리가 감당할 사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