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 나아가는 무제한적 자유

David Wilkerson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에베소서 3:11-12).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금까지 인류에게 주어졌던 가장 큰 특권중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든지 우리 주님께 달려갈 수 있는 권리와 담대함 그리고 자유를 갖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영원한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그 오른편에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이 보좌가 있는 방밖에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열려있는 문들이 있습니다. 언제나 ―낮이나 밤이나, 24시간 내내― 호위천사들과 네 생물을 지나 우리들은 이 문으로 담대히 들어가서 우리 아버지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와 긍휼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바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약에서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은 아브라함이 여러 번 하나님께 나아갔고 그것을 즐거워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실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하나님께 말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조차도 "휘장 밖에" 남아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을지라도, 그는 결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하고 거룩한 곳으로 나가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하는 영적 휘장이 아직 둘로 찢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운데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꿈과 환상을 통해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민수기 12:6).

이것은 하나님께로 나가는 것이기는 하였지만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모세의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12:7-8). 아브라함처럼 모세는 하나님께 말하였고,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사십 주야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였고, 마침내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습니다. 분명히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머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출애굽기 29:42-43).

아무도 하나님의 임재가 거했던 지극히 거룩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단지 대제사장이 1년에 한차례, 대 속죄일에 만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들의 희생물을 장막문으로 가져가야 했습니다. 그들은 문틈을 통하여 살짝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것도 충분히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장막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장엄함에 그저 궁금할 따름이었습니다.

이것 역시 매우 제한되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정문으로 나와라. 거기서 너를 만날 것이고, 그 다음에 우리는 서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안으로는 초대받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막문의 반대편에서 그들에게 말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식으로 가까운 친구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으십니까?

장막내부에는, 휘장이 성소와 지성소를 분리하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휘장 가까이로 나아갔을 때, 그는 매우 떨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것은 무섭고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단 한치의 더러움이라도 범한다면, 그 사람은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속에는 어떤 종류의 죄와도 함께 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속죄일이란 분명 경이로운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 날, 이스라엘의 모든 아이들은 장막문 주위에 모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문에서 모세의 지도력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던 미리암을 심판하셨고, 또한 같은 문에서 모세에게 대항하여 일어났던 다단과 아비람을 심판 하셨습니다.

이제 대제사장 아론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그 신비스러운 방으로 들어가고 있을 때, 무리들은 두려움 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장막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예시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안은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 눈으로 주님을 볼 수 있을까? 그분의 음성은 우리들이 시내산에서 들었던 것과 같이 두려운 것일까? 그분은 친절하고 점잖은 분이실까, 아니면 두려운 분이실까?" 라고 궁금해 하며 장막 밖에 남겨져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사랑스러운 시편 저자인 다윗조차도 하나님께로 나아감에 제한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과 교제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주님이 그의 보호자요, 피난처시요, 지키시는 자시요, 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보다 더 위엄있고 강력하게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지성소에 들어가는 특권을 얻지 못했습니다. 시편 전체를 통하여, 다윗은 하나님을 동경하고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그는 그 휘장 너머에 이르기 위해 외쳤지만 그것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깊음이 깊음에게 소리치며"(시편 42:7).

솔로몬 또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그러나 채워지지 않는 이 열망을 표현한 바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아가 5:4-6). 이는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언어입니다. "나는 그분을 찾았습니다, 나는 그분을 열망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을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의 지성소라고 불리우는 방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위엄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습니다. 건물이 다 지어졌을 때, "솔로몬이 그 부친 다윗이 드린 은과 금과 모든 기구를 가져다가 하나님의 전 곳간에 두었더라 ... 궤와 ... 모든 거룩한 기구를 메고 올라가되 ... 여호와의 연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역대하 5:1, 5, 7). 모든 것이 자리를 잡은 후,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지성소로 오시고 그곳을 그분의 임재로 거룩하게 하시기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가득 채운 구름 가운데 그곳에 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거민들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대성전에 거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사람들은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의 백성이 그 적국으로 더불어 싸우고자 하여 주의 보내신 길로 나갈 때에 저희가 주의 빼신 이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여호와께 기도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저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 일을 돌아보옵소서"(역대 하편 6:34-35).

솔로몬은 "주님 우리군대가 우리의 적과 싸우러 나갈 때, 성전에 계신 당신을 향하여 그들이 기도하거든 들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소서!" 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전쟁터에 계시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면, 그들은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기도하거든.....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라고 기도하게 되어 있었습니다"(6:38-39). 이것은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왜 예루살렘쪽 창문을 열어두고 기도하였는가를 말해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다니엘 6:10 참조). 오늘날에도, 유태인들은 예루살렘 쪽을 향해 기도합니다. 사실, 저는 비행기 기내에서 기도 숄을 쓰고 예루살렘을 향한 채 비행기 통로에 서서 기도하던 어떤 정통 유태인을 본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 거하시던 하나님의 영광에도 불구하고 ― 선지자들에게 주셨던 꿈과 환상에도 불구하고, 천사들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 아직 하나님의 백성들은 휘장밖에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성소로 향한 그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나가는 것은 여전히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훨씬 거대한 통로를 열게 주셨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아버지께로 더욱 더 나아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아직 하나님께로 나간다는 것은 여전히 매우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 아기로 세상에 오셨을 때, 오직 적은 무리의 목자들과 박사들만이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그분이 오실 것에 대해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뒤에서, 제사장들은 열심히 그들의 임무를 다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늘상 하던 대로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소년이었을 때, 몇몇 사람들이 성전에서 그분을 보았습니다. 그 대부분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었는데,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지식에 대해 놀랐습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후, 어떤 사람들은 목수로서 힘써 일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서진 의자를 고치고 있었을 때, 누가 예수님께서 육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고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단지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요셉의 훌륭하고 젊은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였을 때, 그는 작은 동네의 적은 무리에게 그분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족속의 잃어버린 양에게 행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한 번에 오직 한 장소에만 계실 수 있었기 때문에, 그분께로 나아가는 것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 다가가기를 원한다면, 유대지방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살고 있지 않았다면, 보트, 낙타 혹은 걸어서 하루 혹은 수주동안 여행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당신은 마을에서 그분의 존재를 추적해야 하고, 거기서 무리들을 발견하고는 예수님께서 어디 계신지를 물어 보아야 했을 것입니다. 또는, 예수님께서 그 도시를 막 떠나셨다면, 당신은 예수님께서 지금 어디로 가시고 계신지에 대해 소문을 들어보아야 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큰 호수의 반대편으로 당신을 태워줄 작은 배를 빌렸을 수도 있고, 또는 그분이 큰 무리에게 가르치고 계시는 광야로 가기 위해 온 종일 걸어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발견하였다면,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그분의 만지심을 받기 위해서는, 그분의 거룩한 임재로 축복 받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가까이 가야만 했습니다. 그분께 가기 위해 군중들 틈을 비집고 나가려고 애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분 가까이 있기를 원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께 나아가는 정말 어렵고도 가장 제한된 길이었습니다. 주님께 가기 위해, 반드시 적절한 시간과 적절한 장소에 있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것을 들었던 소경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이 그분이 어떤 사람인 것을 알았을 때, 그는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님, 저를 고쳐 주세요, 제가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오직 그 때만, 그리스도께서 그를 고쳐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혈우병을 앓고 있었던 여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는 예수님의 옷깃에 손을 대기 위해 밀고 기면서 군중사이를 뚫고 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께 손을 갖다 대려 하고 있었습니다.

또, 죽은 아들을 매장하기 위하여 장례 행렬을 인도하던 나인성의 한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행로를 가로지르면서, 상여에 손을 대고는 그 소년을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또, 양문 근처의 벳세다 연못에서 있던 허약한 남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병자들과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고침을 받기 위해 거기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 사람은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 곁을 지나가실 때 물론 그를 고치셨습니다.

당신은 주님께 다가가기 위해 미리 시간을 계산하고 계획을 세워야 했을 겁니다. 삭개오도 이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을 한번 보기 위해 나무에 기어올라간 것입니다. 4명의 다른 사람들은 병든 친구를 위하여 유사한 방법으로 이 문제를 풀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가르치시던 혼잡한 건물을 찾고는 지붕에 구멍을 뚫고 예수님의 눈앞으로 그들의 친구를 달아 내렸습니다

마침내, 갑작스럽고도 영광스러운 어느 순간, 예수님께서는 완전하고 무제한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골고다 언덕, 피로 얼룩진 십자가상에서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태복음 27:50-51).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순간에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은 문자그대로 양쪽으로 갈라졌습니다.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죽으시던 순간에, 우리들은 지극히 거룩한 곳, 지성소로 완전하고도 무제한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브리 10:19-20).

이 육신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영적인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침내, 우리들은 여러 세대에서 불가능했던 것을 이제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다윗조차도 가질 수 없었던 특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거룩하고 거룩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문은 우리들에게 더 이상 닫혀 있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안을 볼 수 있고,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무제한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그분은 이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예루살렘, 곧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성전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의 역할을 맡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수 중보의 향을 가지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으로 바로 걸어 들어가셨고 속죄소에서 그분의 피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힘과 권세와 영광으로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영적인 몸으로 받아들이시겠다고 약속하신 언약의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분의 자녀를 부르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 놓았다. 너희들은 이제 믿음으로 내 안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이제 보좌 앞으로 담대히 오라. 내가 너희를 아버지, 이제 너희의 아버지 존전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너희는 낮이나 밤이나 하나님께로 제한없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예수님의 애끊는 마음과 고통 그리고 슬픔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그것은 하나님께로 완전하고 무제한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세대가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세기 동안, 하나님의 사람들은 휘장을 지나 들어갈 수 있기를 빌고 간구 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시대의 축복을 보기 위해 열망하고 소원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께로의 나아감은 모세가 그렇게도 열망하던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보기를 원하였지만 볼 수 없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를 통하여도 나갈 수 없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우리 시대에 이렇게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보고는, 우리를 위하여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선물이자 권리를 아주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 문은 우리를 위해 열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날이 가고 주가 바뀌어도 한번도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큰 범죄입니까! 우리가 평소와 같이 그 문을 지나치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값을 지불하고 사셨던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무시할 때마다 우리는 그분의 피를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가기만 한다면 필요로 하는 모든 자원을 가지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그분의 값비싼 선물을 무시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훈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히브리 10:22-23) 이 구절은 기도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강권하고 계시다고 말입니다. "매일 나의 존전으로 자주 나아 오라. 만일 네가 나를 가까이 하지 하지 않으면 너의 믿음은 지속할 수 없다. 만약 네가 내 존전으로 담대하게 들어오지 않으면, 너의 믿음은 흔들릴 것이다."

당신은 한 때 예수님을 향한 정렬에 불타오르던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늘 주님을 위하여 그분의 말씀을 찾고 그분과 함께 골방에서 그분과 함께 유용한 시간을 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믿음을 살아있는 상태로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동일한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단지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은 잠시동안만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안녕하세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오늘도 저를 인도해 주세요.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들에게서 주님을 찾는 마음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이 한때 서두르지 않고 누렸던 주님과의 교제는 이제 더 이상 없습니다. 당신이 그들에게 그들의 내버려둔 기도생활에 대하여 물어볼 때, 그들은 "믿음의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곧 믿음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공급을 위해 가까이 하기를 거절하고, "나아감"의 선물을 져버리면 져버릴수록 그만큼 그들은 표류하여 더욱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예루살렘으로 인해 근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회당에서, 언덕에서, 작은 배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은 병든 자를 고치셨고, 이사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잔치석상에서 목소리를 높여 소리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물, 생수이다. 나에게로 오라, 그리고 나는 너의 목마른 영혼을 만족시킬 것이다." 누구라도 그에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초대는 대부분 묵살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로 인해 부르짖으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3:37). 그분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 있다. 네가 지금 이용할 수 있다. 나는 너에게 고침을 받고 너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내게 나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너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거절에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그는 선언하셨습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23:38).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황폐하다는 의미로 사용하신 단어는 외로움과 열매없음, 버려짐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너의 교회생활, 너의 가족, 너의 영적인 발자취 - 그것들 모두는 결국 말라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부모들이 매일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면, 그들의 자녀들은 확실히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그들의 집은 세속적인 것들로, 영적인 황폐함과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으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결국, 그 가족은 완전히 멸망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은혜의 날에 이러한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라고(23:39) 덧붙여 말씀 하셨습니다. 그 의미는 이러합니다. "나는 너에게 네가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주었다. 그러나 너는 내 제안을 무시하였다. 미안하지만 너의 결정은 너의 생활과 너의 가정에 멸망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너는 영원히 다시 나를 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나간 것이 언제였습니까? 당신의 가족, 당신의 직업, 당신의 건강으로 인한 위기에 직면해 있는 환란 가운데 있었습니까? 이렇게 힘든 필요가 있을 때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백성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이사야 26:16). 다윗왕도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시편 142:1-2).

우리 주님은 어려움에 처한 그분의 자녀들을 깊이 돌아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힘든 시간과 마주서야 할 때, 그분은 우리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강권하십니다. "너의 모든 근심과 필요와 불평을 나에게 쏟아 놓으라 내가 너의 부르짖음을 듣고 응답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때가 아버지가 나아가는 유일한 때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다윗이 묘사한 하나님을 향한 강한 열망,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는 깊은 목마름이 어디에 있습니까? 매일 사랑과 경배의 마음을 쏟아 놓으며 그분께 드리는 섬김이 어디 있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처해있는 위험을 깨닫지 못합니다.

반대하는 분이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게 어떻다는 거지요? 그래도 그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피로 깨끗함을 입고, 용서함을 받아 천국에 가게될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까? 약간 미덥지근해졌다고 해서 위험할 게 뭡니까?"

저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 우리가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요구하는 바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쁜 일정과 활동에 매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하나뿐인 아들의 생명으로 치루신 값으로 이루신 하나님께 나아감을 우리가 거부한다면 하나님께서 가볍게 여기지 않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강한 성루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곳으로 달려가는 자들만이 안전합니다(잠언 18:10). 만약 당신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 때 당신은 여전히 문 밖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 있었던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문에서 더 이상 아무도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공급하심, 죄사함, 필요시의 자비로운 채우심, 어려움을 극복할 능력은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님이 느끼는 거절의 고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두분 사이의 대화를 상상해 봅니다.

"아들아, 너는 매를 맞고, 조롱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무덤에 묻혔다. 그것은 나를 무척이나 고통스럽게 하였다. 나는 그 광경을 볼 수 없어 눈을 감아야 했다. 그러나, 너는 영원한 언약을 성취하였다. 너는 너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이 용납 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나에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너로 인하여, 마지막날 사람들은 나에게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까지 없었던 유혹과 시험을 하는 마귀를 대적하여 믿음을 세워 준비하고 나의 능력 안에서 힘을 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은 어디있느냐? 월요일이 지나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본 적이 없다. 화요일이 다가오고 있다, 여전히 아이들은 없구나. 수요일이 되지만, 그들을 보이지 않는구나.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이 지나간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일요일에만 그것도 교회에 있을 동안만 우리에게 다가오는구나. 왜 그들이 오지 않는 것일까? 그들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었을 때 이와 똑같은 질문을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셨습니다.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 3:9).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죽 어디 있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상 아담에게 왜 하나님과의 교제를 거절했는지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피해 숨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아담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사데교회의 상황과 같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요한계시록 3:1).

예수님은 "너는 누구를 위해서든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좋은 인간일 지 모른다. 그리고 교회와 세상 양쪽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너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로 살아있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망의 요소가 네 생활 가운데로 스며들었다. 세상에 속한 무엇인가가 너를 더럽혔다."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3:4). 여기에서 언급된 더러움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경고가 있습니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요한계시록 3:2).

사데 교회 신자들은 깨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전에 주님을 찾았던 것과 같이 주님을 기다리며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점점 더 자기 자신들을 부주의하고 태만하도록 내버려 두어 매일 하나님의 도움심을 구하러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영적 더럽힘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더렵혀졌다는 의미로 사용하신 단어는 죄로 오염된 토양, 흰옷에 있는 검은 점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만약 네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너는 적군을 방어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너의 태만으로 네 옷이 더럽혀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몇 명에 대해서는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3:4)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여전히 나를 향한 소망의 작은 불꽃을 가지고 있다. 너는 나의 임재를 잃어버리고 매마른 곳에 버려지지를 원치 않고 있다. 지금 빨리, 너의 마음을 주님을 향해 갈급 하도록 하여라. 은밀한 기도의 골방으로 돌아가서 나를 부르라. 네 마음을 부싯돌 같이 강하게 하여라! 네 주위의 많은 사람들처럼 믿음의 불꽃이 꺼져 죽기 전에 사망이 네 영혼에 자리를 잡기 전에 믿음의 불을 지펴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위대한 선물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영원한 미래는 그것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하고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분은 당신에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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