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는 나팔 무시되는 경고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서 아모스는 가장 명확하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향해 외치고 있습니다. 그가 전하는 예언의 말씀은 마치 오늘 신문의 헤드라인을 찢어서 붙여놓은 것처럼 우리 세대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아모스의 메시지는 이중적인 예언입니다. 그의 예언은 그가 살던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 뿐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교회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아모스는 심판으로 이스라엘을 칠 준비가 되어있는 포효하는 사자로 하나님을 묘사하였습니다. "사자가 부르짖은 즉 누가 두려워 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아모스 3:8). 그는 "하나님께서 부르짖는 사자와 같이 일어나셔서 그 먹이가 될 자들을 칠 준비를 하셨다. 이 사자의 포효하는 소리를 들으니 나는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주님은 아모스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깨우셨습니다. 주께서 주시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넘치는 악과 부패로 인해 그의 백성들에게 곧 심판을 내리실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예언적 경고의 소리를 먼저 발하지 않고서는 백성을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아모스 3:7). 아모스는 심판의 구름이 몰려드는 것을 보자 외쳐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아모스 3:6). 이 아모스의 메시지는 우리를 전율케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경고의 나팔을 부셨다. 그러나 아무도 놀라지 않고 있다."

오늘날 심판과 관련된 말씀을 듣기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미국은 이미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우리는 언제고 또 다른 테러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미국 경제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불길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이런 상황을 견뎌 낼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든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기름부음 받은 종들에 의해 직접 전달되듯이 주님의 영은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을 힘을 공급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신실하게 그의 백성들에게 능력을 주시어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치든지 견뎌내게 하실 것입니다.

아모스의 예언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 다시 말해 타협한 교회를 향하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이방 나라들을 향해서도 예언하였습니다. 이 이방인들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의 진노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접경지역을 강탈하고,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키며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쳐서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고 외쳤습니다(아모스 3:1). 사자의 포효하는 소리가 이제 이스라엘을 향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께 드리는 순전한 예배를 더럽힌 죄에 대한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아모스 3:2).

성경 전체를 통해서 되풀이되는 한 가지 신성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민족에게 부어주신 은혜의 분량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멸시를 받을 때 그 민족에게 내릴 심판이 더욱 커진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느 민족이 많은 진리를 받았다면, 그 민족에게는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진리를 더럽힌다면 그들에게 임할 심판은 배가 될 것입니다.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는 미국의 사악함으로 인해 미국을 심판하고 계심이 분명합니다. 저는 미국이 하나님의 이름을 사람들에게서 지워지게 했던 방법들을 생각해 봅니다. 저는 어릴 때 미국이 진리가운데 주님을 경배할 수 있는 자유를 찾았던 거룩한 사람들에 의해 설립된 기독교 국가라고 배웠습니다. 물론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몇몇 다른 나라들도 그 나라의 기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미국과 같은 특정한 나라들을 축복하셔서 세계를 복음화 시키는데 사용하셨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습니다. 국가성립의 초기에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였습니다. 미국은 목사, 교사, 전도자들을 전 세계에 파송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본국에 남은 거룩한 백성들은 죄악의 물결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냈습니다. 경건한 지도자들, 거룩한 설교자들과 열정적인 성도들은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힘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가 관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쾌락에 미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부와 번영, 물질적 풍요라는 우상을 의지하였습니다. 우리는 곧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우리의 열정과 연민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위대한 선교사 파송국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는 풍요와 탐닉의 복음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큰 사랑과 지혜가운데 미국이라는 나라를 심한 채찍으로 정결케 하고자 애쓰셨습니다. 주님은 가뭄, 홍수, 재정적 붕괴, 토네이도, 태풍, 급작스러운 기후 변화를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은 나팔을 강력히 불고 계십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소리에 놀라지 않습니다.

많은 목사들은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비극적인 사태들의 배후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사탄의 역사입니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설교자들이 얼마나 저를 분노케 하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알지 못합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한 다음의 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 *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한가하게 하며 너희 각처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아모스 4:6).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에게 경제적 몰락을 일으키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 * "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어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아모스 4:7). 좋든지 나쁘든지, 주님께서 모든 날씨를 조종하고 계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 * "두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히 마시지 못하였으나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아모스 4:8). 하나님께서는 가뭄을 통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수많은 미국의 주들에서 심각한 물 부족으로 물을 배급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 * "내가 풍재와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팟종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 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아모스 4:9). 최근 몇 달 동안 뉴욕은 알풍뎅이라는 곤충 떼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해충은 뉴욕 시 맨하탄 중앙공원에 있는 나무들을 죽이고 뉴욕 주 북부의 방대한 숲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 * "내가…너희를 쳤으며"(아모스 4:9). 이 모든 일을 누가 행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의 배후에 그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분명히 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너희 중에 염병이 임하게 하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아모스 4:10).

주님께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심판의 배후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을 온유하고 사랑이 넘치는 할아버지와 같은 분으로 묘사합니다. 물론 주님은 자비로우시며 은혜가 넘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자들이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그분의 자비와 긍휼이라는 점입니다. 주님은 "내게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나라를 정결케 하고 너희들의 관심을 내게로 돌리게 하기 위해 이 모든 징계를 보내야 했다. 너희는 너무나 깊은 죄를 지었고 스스로를 눈멀게 하였다. 이제 심판만이 너희들이 이해하게 될 유일한 언어가 될 것이다. 이것이 너희를 향한 나의 사랑이다."

아모스는 이중적인 심판, 즉 나라에 임하는 심판과 동시에 교회에 임하는 심판에 대해 예언하였습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심판을 "성중의 큰 요란함"으로 묘사했습니다(아모스 3:9). 여기서 요란함이란 단어는 혼돈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 나라가 혼돈가운데 들어가게 될 것이며 커다란 폭력과 테러와 공포로 인해 혼란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아모스 3:10). 아모스가 여기서 언급한 궁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우리가 소위 대기업이라 부르는 것에 관해 말하고 계십니다.

지금 미국에서 드러나고 있는 사건들에 관해 생각해 보십시오. 역사상 가장 존경 받는 기업가들 대다수가 "자신들이 세운 제국에서 행한 강도 짓"으로 인해 발가벗겨지고 있습니다. 신탁 회사들의 이사들은 왜곡된 회계 관행을 통해 주식 보유자들을 속여 왔습니다. 그들은 수천명의 직원들을 해고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엄청난 비자금을 챙겼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경제적 파탄의 지경으로 몰아넣으면서 자신들은 도피할 수 있는 부를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아모스는 "그 궁궐이 약탈을 당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아모스 3:11). 한때 아무도 흔들 수 없던 대기업들이 지금 파산신청을 하고 있습니다. 월 스트리트는 진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끔찍한 것은 아모스가 전국에 걸친 테러 공격 때문에 발생하는 두려움의 재앙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며"(아모스 3:11). 이 예언자의 말을 적용하는 데 현재보다 더 적절한 때가 있을까요? 그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적이 너희의 영광의 관을 집어 던질 것이다. 너희들이 영화롭게 여겼던 권력과 부의 그 궁궐들은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이러한 일이 있은 다음에는 경제적인 사자가 나타나 남의 것을 훔쳐 부유케 된 자들의 부와 풍요를 삼킬 것입니다.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퉁이에나 걸상에 비단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냄을 입으리라"(아모스 3:12).

사자가 먹이를 삼킬 때 뼈 외에는 남는 것이 없을 때까지 먹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아모스는 이 대적이 사치스러운 부자들에게 그와 똑같이 임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정하게 얻은 부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아모스는 그들에게 "너희들은 모아 놓은 수백억의 재산 때문에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포효하는 사자는 그것을 다 삼킬 것이다. 사자가 먹기를 마치면 뼈 외에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똑 같은 경고의 나팔이 오늘날 미국에도 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리를 듣고 놀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심판하실 때 동시에 교회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심판이 하나님의 전에서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주님께서는 어떤 나라를 치시기 전에 자신의 분노를 교회에 드러내십니다.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거하라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단들을 벌하여 그 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아모스 3:13-14) 야곱의 족속이란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여기까지 아모스가 예언한 내용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주께 등을 돌린 모든 나라들을 분명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악한 원수들이 그러한 나라들을 노략하고 공포가운데 집어넣는 것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쾌락과 방탕에 자신을 내어 준 사람들은 겸비케 되어 낮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주요 관심은 여전히 교회에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백성, 자신을 주의 이름으로 부르는 자들에게 몰두해 계십니다.

미국 정부가 하나님의 이름을 그 동전에서, 법정에서, 학교에서, 공공장소에서 없애느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 중 어느 것도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사악함 만큼이나 주님을 슬프게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세상 밖으로 몰아내려고 하는 타락한 자들의 어리석은 시도들을 비웃으십니다. 그들의 심판의 날은 벌써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들에게는 주님의 분노가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장 아프게 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분의 가족입니다. 주님은 그분의 자녀들의 사악함으로 인해 가장 깊은 상처를 받으십니다.

이제 주님은 그 초점을 이스라엘의 제단에서 일어나는 일로 바꾸셨습니다. 벧엘이라는 이름은 "주님의 집, 순전한 예배의 장소"라는 뜻입니다. 한 때 이 제단은 "여호와께서 계시는 곳" 이라고 전해졌었습니다(창세기 28:16). 사실 야곱은 벧엘을 두려운 장소라고 불렀습니다. "두렵도다 이곳이여"(창세기 28:17).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자신의 임재하심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야곱이 그곳을 경외하는 장소로 여겼다는 뜻입니다.

벧엘은 야곱이 천국으로 뻗어있는 사다리를 보았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순전함으로 주님을 찾는 자들을 만나시는 거룩한 예배의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종종 주님은 자신을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제단을 회복시키러 벧엘로 돌아가라고 지시하신 적도 있습니다.

요약 하자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는 네 악한 나라를 심판하려 한다. 너희들에게 임할 전쟁과 포악함으로 인해 세계가 두려워 떨 것이다. 나는 홍수, 가뭄, 질병, 곰팡이로 인한 식물의 고사와 같은 것들을 보낼 것이다. 너희 경제는 흔들릴 것이며 너희의 부는 삼킴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나는 벧엘을 찾아가겠다. 나는 나의 심판을 내 백성에게 쏟아 붓겠다. 그들이 내 제단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타락한 제사에 대해 그들을 벌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벧엘에서 일어났습니다. 여로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 그는 그곳의 제사를 타락시켰습니다.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열왕기상 12:28-31).

먼저 여로보암은 예배의 장소에 우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세상의 비류들을 데려다가 제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악하고 죄 된 마음으로부터 나온 이스라엘의 제사는 완전히 부패했습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의 통치기부터 아모스 선지자가 살던 시대까지 하나님께서는 벧엘을 혼합된 장소라고 경멸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이 거짓 예배를 심판하셨습니다. 주님은 그곳의 제단을 헐고 완전히 부수어버리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벧엘의 영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영적 상태입니다. 그 주요한 특징으로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혼합적 예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열정과 활기가 넘치는 인간적 과시일 뿐입니다. 벧엘의 예배에는 어떤 거룩함도 없습니다. 그것은 이 마지막 시대 수많은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더 이 예배가 영적인 것이라고 믿을수록 그들의 눈은 더욱 어두워집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주님은 경고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만약 이 타락한 예배에 관여한다면 너희는 너희 죄를 더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는 강력하게 촉구하십니다.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 내어 광포하려무나"(아모스 4:5).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소제를 드릴 때 율법에 의하면 어떤 누룩도 불로 사르는 것이 금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레위기 2:11). 게다가 누룩 넣은 떡은 제사장들만을 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감사제를 위한 떡은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이어야 했습니다(레위기 7:12).

이러한 누룩 넣지 않은 제물은 우리에게 예증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순결한 찬양을 상징합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누룩은 죄악 된 육의 한 형태로서 나타납니다. 때때로 나병을 언급하는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시편 24:3-4).

벧엘에서 제사를 드리던 자들도 겉으로는 매우 경건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 열정적으로 희생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십일조와 헌금을 성실히 했습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촉구하셨습니다.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아모스 4:4). 주님은 이 백성들이 하루 하루를 찬양과 예배로 시작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찬양의 모임에 가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벧엘 예배 운동은 너무나 유명해져서 벧엘에서부터 길갈과 브엘세바까지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 모두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아모스 5:5).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파괴하실 작정이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모든 누룩이 든 예배와 찬양을 다 태워버리실 작정이셨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 백성들이 "정의를 땅에 던졌기" 때문입니다(아모스 5:7).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그에게 상달 되는 거룩하고 순결한 찬양으로 하나님께 감사 드리십시오.

하나님께는 여전히 그 찬양의 제사가 순전한 거룩하고 구별된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 경건한 성도들은 세속적인 것들을 추구하는데 몰두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예배에는 강하고 급한 많은 물소리와 같은 소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거룩한 경외심과 더불어 주님 앞에 상한 심령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경외심으로부터 영광스러운 찬양의 외침이 나옵니다.

그러나 교회의 수많은 무리들은 언제나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새롭고 흥미로운 방법들을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벧엘 제단을 추구합니다. 그곳의 찬양이 크고 기쁘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곳의 예배는 하나님의 전에 만연한 죄로 인해 애통해 하지않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의 찬양은 다채롭고 풍부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임재가 없습니다. 그리고 육의 현혹으로부터의 보호도 없습니다.

벧엘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하는 것은 아마도 꽤 흥미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것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를 돕거나 궁핍한 자에게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들의 찬양은 육과 누룩으로 가득찬 것이었습니다. 아모스는 경고하였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아모스 5:6). 이와 같이 저도 주님께로부터 온 이러한 경고를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의 목회자는 죄를 드러내는 말씀을 선포하지 않습니까? 경건한 책망, 회개로의 외침, 죄를 버리라는 경고가 전혀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벧엘 제단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여러분은 속임수에 현혹될 커다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 하는 날에 벧엘의 단들을 벌하여 그 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아모스 3:14). 구약에서 성전의 나무 제단은 네 모퉁이에 뿔이 새겨져 나와 있었습니다. 이 뿔들은 놋으로 덮여 있었고 숫양의 뿔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뿔은 성소의 면죄특권을 상징합니다. 그 뿔을 잡음으로써 범죄자는 자신을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보호아래 둘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는 많은 경건한 어른들이 "주님, 나는 안전합니다. 저는 제단의 뿔을 붙들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곤 했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의 삶에서 이러한 성소 면죄특권의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반역한 아들은 이스라엘의 왕좌를 강탈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다른 아들 솔로몬이 아도니아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이 소식에 혼비백산한 아도니야는 성전으로 달려가 성전의 뿔을 붙잡았습니다. 그의 생명은 보존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아모스에게 이 놀라운 보호의 뿔을 잘라버리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제단에서 그 뿔을 절단해서 땅에 던져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백성들이 더 이상 주님의 보호아래 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도리어 그들은 커다란 현혹과 속임수에 노출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거짓 예배나 그릇된 교리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뿔이 없는 제단에서 드리는 예배의 끔찍한 결과를 보았습니다.

전세계에서 수많은 무리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모태에서 예언을 주셨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아프리카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인들이 수백 명씩 무리를 지어 이 사람으로부터 "개인적 예언"을 받고자 여행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완전히 비성경적이며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구도자들은 현혹과 속임수의 덫에 걸려들고 있습니다.

발칸 반도의 한 나라에서는 어느 여 선지자가 사람들을 지옥으로의 여행에 안내한다고 합니다. 이 여자는 술사였었는데 자신이 한 때 지옥에 갔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을 바닥에 누이고는 그들의 마음을 놓아주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그녀가 경험한 바와 같은 상상의 여행으로 안내합니다. 사람들이 그 경험을 해보고자 그녀에게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100% 비성경적이며 순전히 혼란을 일으킬 뿐입니다. 사실상 이러한 일들의 저변에는 악의 역사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브라질에서는 어느 전도자가 1000달러에 사람들의 암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는 또한 돈을 받고 축사를 행합니다. 그는 많은 추종자들을 모았고 자신의 주장으로 인해서 부유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비성경적이며 완전한 속임수입니다.

미국은 세계 최악의 거짓 복음을 전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으로 문맹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수고를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금식하거나 기도의 시간을 보내려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육을 즐겁게 하는 타협한 전도자들의 가르침만을 추구할 뿐입니다.

어떻게 수많은 믿는 무리가 그런 현혹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그들이 그토록 쉽게 타락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육의 거짓 역사를 볼 수 있는 눈이 멀게 된 것일까요? 아모스는 그 이유를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죄 때문에 그들의 보호의 벽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단에서 그 뿔을 제거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분별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 신자들이 적그리스도를 환영하는 최초의 사람들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심판하실 때 오염된 모든 것을 폐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포도원(교회)에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찌로다"(아모스 5:17-24).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주님의 공의가 우리 가운데 흐르기 시작해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 질 때까지 우리는 주님께 진정한 희생제사를 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정욕과 탐심으로 가득찬 마음에서 나오는 찬양은 주님의 귀에는 시끄러운 소음일 뿐입니다. 주님은 쾌락만을 추구하거나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모든 예언적 경고 가운데 아모스는 다음과 같은 소망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찌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찌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아모스 5:14-15).

여러분에게 강권합니다. 아모스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주님을 전심으로 찾으십시오.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으로 판단을 받도록 허락하십시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버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분별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벧엘 제단에서 예배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신령과 진정으로 주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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