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David Wilkerson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편 23:5).

하나님께서 시편 23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약속들 중에서 이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약속 중 하나입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시겠다고 맹세하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상을 차리시고, 그 상위에 온갖 좋은 음식들을 펼치시고, 주님께서 직접 웨이터의 앞치마를 두르시고 우리에게 만찬의 시중을 들어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원수들 앞에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찬, 잔칫상을 베푸시겠다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그저 평범한 보통 식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상”이라는 단어는 “펼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한 접시의 음식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엄청난 종류의 음식들, 거대한 만찬, 엄청난 잔칫상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먹고 즐길 수 있도록 맛있는 하늘의 음식을 코스별로 하나씩 하나씩 우리 앞에 차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만찬에는 단 한명의 손님이 있을 뿐입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경이로운 잔칫상과, 섬김과 봉사를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는 각 개인을 위해 행하십니다.

게다가 분위기를 맞추시려고 하나님은 이 만찬이 웃음, 기쁨, 노래를 위한 시간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며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니” (전도서 10:19).

그리고 여러분이 그 호화로운 음식을 먹고 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머리에 기쁨의 기름을 부으십니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시편 23:5).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시편 45:7).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만찬을 준비하고 돌보는 동안 하나님은 여러분의 원수들을 그 연회의 가장자리에 앉게 하시고 이 모든 광경이 펼쳐지는 것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직접 상을 차리시고 우리의 좌석을 안내하시고 섬기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하늘의 즐거운 음식으로 우리 영혼을 채우는 것을 목도 할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사탄의 능력도 심지어 사탄 그 자신조차도 이러한 종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광경입니까? 여러분 상상이 가십니까? 우리의 원수들은 충격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실족함으로 인해 여러분을 내려 치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파멸 가운데로 빠져드는 것을 바라보며 흐뭇해 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보게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섬김을 받으며 연회에서 음식을 먹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섬기시고, 먹이시고 기쁨과 즐거움의 기름으로 바르시는지를 강제로 목도 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께서는 이러한 것을 모든 자녀들을 위해 행하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누가복음 12:27).

주님의 잔칫상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원수가 누구인지 논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쓰이는 원수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한가지는 악마적인 영적 차원의 원수이고 또 다른 한가지는 인간적 차원의 원수입니다. 여기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악마적인 영적 차원의 원수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귀와 그를 따르는 지옥의 정사와 권세 모두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원수는 마귀”입니다 (마태복음 13:39). 다윗이 시편 18편에서 자신의 “강한 원수”를 언급했을 때 그는 주님과의 강력한 동행 때문에 자신을 미워하는 마귀의 무리들에 관해 이야기한 것입니다.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시편 18:17).

그러나 원수들 중 다수는 지옥에서 온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분명 마귀와 그 무리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서 사탄에 의해 도구로 이용당하는 여러분 삶 속에 있는 사람들에 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통곡하도록 만든 자들은 육을 가진 원수들이었습니다. “여호와여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 (시편 143:9).

여러분께서는 아마도 작고 일정한 삶의 영역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원수가 별로 없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여러분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가 너무나 넓기 때문에 셀 수 없이 많은 원수의 무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든 여러분이 예수님을 따르기로 마음을 정했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거슬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불신자뿐 아니라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똑같이 거부를 당하고 저항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은 마귀와 그 악한 영들의 표적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원수, 참소자는 여러분을 육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공격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수는 여러분의 인간적 원수들로부터 여러분에게 문제를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주님께서 베푸시는 초자연적인 하늘의 만찬은 훨씬 더 경이롭습니다. 왜냐하면 두 부류의 대적들이 다 한쪽에 앉아서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수종 드시는 것을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쪽에는 마귀와 그 무리가, 그리고 또 다른 한쪽에는 이 땅의 원수들이 다 모여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주님은 기쁨의 기름을 여러분에게 부어주십니다.

영적인 원수인 마귀는 분노합니다. 그는 여러분이 완전히 끝장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원수들에게 하나님은 부끄러움을 부으십니다. “내가 저의 원수에게는 수치로 입히고 저에게는 면류관이 빛나게 하리라”고 원수뿐 아니라 의인에 대해서도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시편 132:18). 하나님께서는 “너의 육적인 원수들은 네가 끝장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내가 너를 먹이고 축복하는 것을 놀라움 속에서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앞에 펼쳐져 있는 영광스러운 음식들을 음미해 나갈 때 주님께서는 허리를 숙이시고 여러분의 귀에 속삭이십니다. “너는 이 원수들 중 어느 누구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너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대저 저희는 너를 해하려 하여 계교를 품었으나 이루지 못하도다” (시편 21:11).

하나님은 승리의 시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실패의 시간 가운데서도 여러분을 위해 이 상을 펼치십니다.

청교도들은 “죄로 인한 경악”이라는 구절을 종종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지으리라고 예상치 못했으나 갑자기 원수가 홍수처럼 몰려오고 죄에 압도되고 마는 때에 대해 언급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가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이미 정복했다고 믿었던 예전의 정욕이나 습관 같은 것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실족합니다.

우리는 곧바로 회개하고, 근심하며 죄에 대해 슬퍼합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자신을 책망하며 죄의식과 혼돈 속에 빠져 뒹굽니다. 그리곤 “어떻게 내가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도록 허락할 수 있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려고 애쓸 때면 부끄러움과 당혹감을 느낍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잠시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해. 어떻게 든 하나님께 이것을 보상해 드려야 돼. 주님께 내가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돼”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합니다.

이때가 우리의 참소자 마귀가 굶주린 사자와 같이 우리에게 달려드는 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신다는 사실에 관한 성경구절 하나 하나를 여러분의 생각 속에 떠올립니다. 그는 빛을 대적하여 죄를 짓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들을 되뇝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실족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노여워하셨는지를 기억 나게 합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이 낙심한 사람들 모두에게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성령을 떠나게 하셨는지를 보라. 지금 너는 똑 같은 죄를 지었어. 하나님은 너의 삶에서 완전히 성령을 제거하셨어. 너는 가짜 신자였고 위선자야. 너는 네가 가르치는 것대로 살지 않지. 심판의 날 심판대에 서게 될 때 네가 가르치고 훈계했던 바로 그 말이 너의 죄를 심판하게 될 거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마귀는 그리스도인의 실족한 후 최후 결과가 어떠할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는 여러분이 실족한 후 어떤 반응을 보일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죄에 어떻게 반응하실지 알지 못합니다. 사실 사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여러분이 죄를 지은 직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용서하심 가운데로 즉시 달려가는 것입니다.

원수는 우리가 언약의 약속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합니다. 그는 여러분을 다시 율법 아래로 끌고 가서 여러분의 양심이 여러분을 정죄하도록 합니다. 원수는 여러분이 자기의 실족함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고 확신하기를 갈망합니다. 그는 여러분이 슬픔에 잠겨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다시 사랑을 받을만한 자리로 돌아가는 길을 찾으려 애쓰는 모습을 보기 원합니다.

그것은 결코 주님께서 회개하는 심령을 위해 의도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진노와 연단을 받을만하다고 생각될 바로 그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만찬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원수가 여러분이 어떻게 심판을 받고 고통스러워 하는지를 보려고 구석에 자리를 잡을 때 주님은 그들을 놀라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상에서 여러분을 먹이셔서 여러분도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녀들을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여기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교회의 한 장로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분은 매일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자기 아내를 존귀히 여기고 자녀를 사랑하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과거의 죄악은 모두 그리스도의 피 아래에 있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급한 성질은 성령의 능력으로 다스려졌습니다. 이 착하고, 사려 깊고, 신중한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 가운데서 움직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원수가 홍수처럼 밀려듭니다. 그 장로님은 직장에서 괴로운 하루를 보냈습니다. 퇴근을 하면서 그의 마음은 괴롭습니다. “주님, 빨리 집에 가서 소파에 누워 오늘 하루가 지나간 것을 감사하렵니다”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는 기도하려 애씁니다.

그 동안 집에서 그의 아내도 역시 끔찍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고 아이들은 통제불능 이었습니다. 그녀는 초조하게 남편이 집에 돌아올 시간만을 기다리며 남편이 버릇없고 삐뚤게 나가는 아이들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남편이 문을 열자마자 아내는 남편에게 달려가 그날의 모든 문제를 남편에게 쏟아놓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남편 역시 너무 지친 상태라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 듣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내는 더욱 실망하게 됩니다. 그들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다가 갑자기 폭발해 버립니다. 순간적으로 그들은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며, 열을 올립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하는 심한 말들이 오고 갑니다.

그러자 남편은 자기도 모르게 이성을 잃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욕설과 저주의 말들을 퍼붓습니다. 그의 아내는 소스라치게 놀라 움찔합니다. “아니, 그게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 아내에게 할 말이야? 그게 모든 사람들이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교회 장로의 입에서 나온 말이냐고? 위선자 같으니…” 아내는 남편의 아픈 곳을 건드립니다.

화가 나서 남편은 돌아서 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그러나 집 밖에서 그는 상처를 입고 전율하며 그의 영혼은 수치심과 거룩한 슬픔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외치기 시작합니다. “오 하나님, 그런 말이 어떻게 나왔죠? 제 마음이 틀림없이 온갖 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겠죠. 가족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모든 좌절감을 어떻게 하죠?”

가장 경건한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이러한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압도되어 놀라곤 합니다. 게다가 가끔은 우리가 커다란 승리를 경험한 직후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담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숨고 싶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가 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탄이 우리의 삶에 개입할 발판을 마련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면 혼돈 속에서 우리는 로마서 7장의 굴레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로마서 7:19).

갑자기 우리는 “내가 이토록 악한데 어떻게 누군가를 섬기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 오, 하나님 얼마나 지나야 제가 또 이 더러운 것들을 털어내고 다시 거룩하다고 느낄 수 있을까요?”라고 생각합니다.

그때가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오라고 부르시는 때입니다. “잔칫상으로 오라. 내게서 멀어져 있는 시간은 필요치 않다. 여기 앉아서 나의 긍휼을 맛보아라. 나는 네가 네 원수가 보는 가운데 내 상에서 먹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에 사로잡혔을 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는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탕자의 비유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방탕한 젊은 아들은 죄에 사로잡혀 자신의 정욕을 채우는데 모든 소유를 탕진했습니다. 그는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자가 되어 돼지의 사료를 먹으며 연명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죄를 너무 많이 지었어. 아버지는 예전과 똑같이 나를 받아주지는 않을 거야. 어떻게 든 대가를 지불해야만 할 텐데…”

탕자는 자신이 가진 두려움때문에 아버지에게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정말로 아들에게 화가 나 있지 않았습니다. 그 경건한 아버지는 단지 아들이 돌아오기 만을 고대했습니다. 마침내 방탕한 아들이 절망의 구덩이에서 자신의 실족함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온전히 느꼈을 때 그는 아버지 집의 풍성함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포자기한 상태로 그는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만나러 뛰어 나갔습니다. 그를 껴안고 그의 목에 키스를 하고 그를 용서하며 아무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누가복음 15:22).

예수님의 표현대로 여기서 우리는 자녀들을 향한 하늘 아버지의 태도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실족한 즉시 우리의 주님은 잔치를 베풀어 시중을 들어주시고 기쁨의 기름으로 우리를 바르십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용서를 구하는 우리 마음의 외침을 들으시는 순간 그는 우리를 위해 상을 차리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내게서 도망하지 말아라. 마귀의 돼지우리에서 마귀의 거짓말을 받아들여 뒹굴지 말아라. 나는 너를 사랑한다. 바로 지금 말이다. 와서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것들을 보아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잔칫상에서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될 축복은 즉각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용서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우리가 회개하자마자 하나님은 우리 죄의 문제를 끝장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한 모든 고소를 취하하시고 그분의 시야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완전히 몰아내십니다.

게다가 주님은 더 이상 우리 죄에 대해 들으려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진정으로 “그 문제는 끝났다. 너도 그 문제는 끝내어라. 나는 너를 전혀 책망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다 묻어버렸다. 이제 나의 구원, 긍휼, 은혜 가운데 기뻐해라. 그 모든 것 가운데 즐거워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를 주님의 잔칫상에 펼쳐진 메뉴 하나하나 즉 은혜, 자비, 온유, 긍휼, 무조건적 사랑, 평강, 안식, 기쁨, 행복,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신선한 샘으로 초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심판과 징벌을 마땅히 기다려야 할 때 주님은 여러분을 긍휼과 은혜의 잔치로 초대하십니다. “주는 선하사 사유(용서).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시편 86:5).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가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음부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시편 86:13).

저는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의 심판이 내게 임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럴 때면 이런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내 몸에 무슨 이상이 생기지 않을까? 내 아이들 중 하나가 고통을 겪게 되지는 않을까? 내 아내가 다시 질병에 시달리게 되는 게 아닐까? 하나님, 제 잘못으로 인해 어디를 치려 하시나요?”

그러나 우리가 실패한 즉시 주님께서는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위한 커다란 잔치를 베푸십니다. 그렇다면 이 원수들이란 누구입니까? 두려움, 절망, 혼돈, 내면적 소용돌이, 사탄의 거짓말과 같은 악마의 것들이 바로 우리의 원수들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붙듭니다. 그리고 제 자신에게 “데이빗, 너는 잘못했다고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어. 네가 해야 할 일이라곤 고백하고 회개하며 아버지의 말씀에 서는 것 뿐이야. 그리고 나서 네 모든 원수가 보는 데서 잔치에 참석해 즐거워하면 되는 거야”라고 상기시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상에 앉고 저의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 저에게 시중을 드십니다. 주님은 그분의 긍휼, 용서와 따뜻한 사랑, 친절로 저를 먹이셔서 제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제 영혼을 감싸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기쁨의 눈물이 제 모든 죄책감과 두려움과 염려를 씻어내 버립니다.

이러한 놀라운 축복이 일어나는 동안 나의 원수들은 이 광경을 내내 멍하니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완전한 패배감을 맛보는 것입니다. 마침내 저는 그들이 “이 녀석이 비밀을 알아버렸어.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있잖아. 다른 데로 가보자”라고 속삭이는 것을 듣게 됩니다.

이제 우리의 인간적인 차원의 원수들 목전에서의 잔치에 초점을 맞춥시다.

시편 23편은 두 종류의 원수, 인간적인 원수와 영적인 원수 모두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인간적인 원수들, 사탄의 도구가 되어 우리를 괴롭혔던 사람들 앞에서도 잔치를 즐기기 원하십니다.

저희 선교회에서 받은 편지의 내용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느 믿음의 자매님께서 아직 구원 받지 못한 자신의 남편과의 힘든 결혼생활에 관해 편지를 보내오셨습니다. 이 남자는 자기 아내의 거룩한 삶으로 인해 정죄 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최근 그는 자기 아내에게 무척이나 거칠어져서 자주 그녀에게 욕을 하고 아내를 괴롭힙니다.

최근 어느날 남편이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왔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그는 아내를 벽에다 몰아세우고는 얼굴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너, 이 예수쟁이, 넌 미쳤어. 네 설교가 지긋지긋해. 더 이상은 듣고 싶지 않아. 너나 나나 다른 게 뭐야.” 그는 저주스러운 언어로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며 끊임없이 그녀를 참소했습니다.”

아내의 마음에서도 화가 서서히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들이 아내를 대하는 남편의 비열한 행동을 비난하고 욕하도록 부추겼고 그녀는 그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그녀는 눈을 감았고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성령이여, 나를 도우소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녀에게 부어졌습니다. 그녀는 초자연적인 평안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녀는 부드럽게 자기 남편을 바라보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는 멱살을 놓고 쿵쿵 소리를 내며 천천히 걸어가 TV앞에 털썩 주저 앉았습니다. 그녀는 마음 속에 기쁨과 평안으로 다시 하던 집안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베풀어주신 은혜, 인내, 그리고 소망을 먹으며 주님의 상에서 잔치를 즐겼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아마도 직장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견디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직장 동료가 여러분을 배반하고 상사에게 여러분에 관해 험담을 하고 거짓말을 퍼뜨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는 잔인한 방법들로 인해 여러분은 여러 날을 슬픔과 눈물가운데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원수의 목전에서 잔치를 즐기도록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 어떤 무기도 너를 해치 못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향해 여러분이 달려갈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 계십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이미 우리를 위해 잔칫상을 베풀어 놓으셨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은혜와 긍휼로 가득 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불신으로 인해 주님의 잔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베푸신 상을 놓쳤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홍해의 구원이 있은 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약속의 땅에서 매년 무교절을 지킬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 명절에는6일 동안 무교병을 먹게 되어 있으며 7일째 되는 날 축제를 열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다른 명절들도 계획하셨습니다. 온 나라가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주님의 임재를 즐기며 주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는 엄청난 시간들 말입니다. 그들의 상은 젖, 꿀, 기름, 포도, 곡식, 고기와 같은 좋은 것들로 가득차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축제 중 하나가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인 초실절입니다. (첫 이삭 드리는 날, 레위기 23:9-14, 유월절 기간의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보리 추수의 첫 소산을 바치고 봉헌하기 위한 절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찌니라” (신명기 26:11).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나는 내가 네게 준 모든 것으로 인해 네가 기뻐하기 원한다. 지금이 네가 기뻐하고 노래하며 기념할 때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유월절을 기념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 절기는 자녀들을 위한 교육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너는 그날에 네 아들에게 뵈어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인함이라 하고” (출애굽기 13:8). 아버지 된 자는 모두 그 아들에게 “이 축제는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굽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란다”라고 말해주어야 했습니다.

모든 축제와 절기를 통틀어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노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각 절기는 원래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을 축하하는 치유와 해방의 잔치로 계획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광야에서 단 한번의 절기만이 지켜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축제는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의 구원 받은 지 일년 되던 날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 후 절기에 대한 명령은 까맣게 잊혀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서 의도하셨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이 축제를 열만한 모든 자원이 풍부한 약속의 땅에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그들은 광야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유일하게 가진 것이라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리신 만나와 그들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약간의 옥수수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축제를 여는 동안 자녀들이 어떻게 생각했을 지 상상이 되십니까? 그들은 평생 아침, 점심, 저녁을 오로지 만나에 의존했습니다. 이제 축제가 열리자 아이는 만나가 더 많이 차려지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아이는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빠, 이 축제는 어떤 거에요?”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아들아, 이 축제는 무교절이란다. 우리는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을 축하하는 거야.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기뻐하는 때란다.”

소년은 갑자기 혼란스러워집니다. “구원을 축하한다고?”그가 부모에게서 들어본 것이라곤 투덜거림, 불평과 불신 뿐이었던 것입니다. 때때로 소년은 부모들이 애굽에서 몰래 가지고 나온 작은 우상을 숭배하려고 장막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가는 것을 보곤 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다시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불러요? 무엇으로 인해 우리가 기뻐해야 하죠? 마른 사막이요? 우리가 경험해 본 것이라곤 매일 똑 같은 지루한 일상뿐인데요. 왜 우리는 만나 몇 개 더 놓고 잔치를 벌여야 하죠? 우리는 왜 좋은 것들이 가득한 곳에서 살지 않나요?”

슬프게도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주님의 절기를 지키는데 실패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3:19).

저는 오늘날 얼마나 많은 십대들이 구원을 증거하면서도 불신에 빠져있는 부모의 세대를 보고 있을지 염려스럽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엄마, 아빠, 이걸 구원이라고 불러요? 우리 가정에는 기쁨이란 없어요. 우리 가정은 혼돈과 다툼으로만 가득한데. 내가 듣는 것이라곤 헐뜯는 소리와 불평뿐인데요. 여긴 장례식장이나 다름없는 곳이에요”라고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토록 많은 십대의 아이들이 주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들의 부모는 아직도 광야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약속을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가본 적이 없어서 기쁨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영적인 침체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계십니까? 언제나 무거운 짐에 짓눌려 하루 하루 매 순간 두려움 속에서 주님과의 동행을 즐기지 못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런 삶이 이제 지겹지도 않습니까? 스스로에게 “나는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내가 변화된 것도 알아. 그런데 왜 나는 잔치를 즐기지 못하지? 기쁨의 기름 부으심이 내게는 어디에 있는 거지?”라고 물어보신 적도 없습니까?

여러분,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흔들리지 않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잔치를 즐길 권리가 있습니다. 지옥의 어떤 마귀도 여러분에게서 그것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당신을 천국의 잔칫상에 앉히는 것을 허락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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