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분노하고 계십니까?
크리스천이 하나님께 분노하는 것보다 위험한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분노하는 성도들의 수는 점점 증가하고 있고, 저는 이것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께 분노하고 적개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그들의 삶과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대신하여 일을 이루지 않고 기도에 응답하지 않기에 하나님은 자기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저는 남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한 젊은이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한때 크리스천이었던 이 죄수가 지금 하나님께 가지고 있는 마음은 분노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 지옥과 같은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곳에 저를 내버려두실 것입니다. 한때 저는 온 맘을 다하여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던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정욕인 성적 욕구가 저를 압도하였습니다. 죄를 뉘우치기도 여러 번, 하지만 나아진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도 했습니다. 아무런 소용이 없었죠. 항상 육신의 죄성이 나를 이기었고, 결국 지금은 그것 때문에 장기 복역자로 수감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영적인 싸움을 포기하였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는 듯합니다. 제가 거듭난 크리스천일 때에 하나님은 저를 마약과 술로부터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왜 성적 욕구는 가져가지 않으셨습니까?"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비통함이 편지를 가득 메우고 있었고 그의 성냄은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교단의 목회자도 이러한 분노를 가지고 있으며 그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지친 그들은 환멸감에 몸서리치며 하나님께 분노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부르심으로부터 떠나게 되었습니다. 떠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신실함과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더 노력하면 할수록 결과는 더 악화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성도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저의 기도도 전혀 효과가 없는 듯했습니다. 어느 순간, 제가 외치고 있는 설교가 모두 거짓인 것 같았습니다. 저의 삶에서 행해지지 않는 일들을 어떻게 설교하겠습니까? 지금은 스스로 깨닫고 경험할 때까지 사역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수년간 이러한 고민으로 목회를 중단한 목회자들이 돌아오는 것을 본적이 거의 없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올바른 일들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라는 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저를 저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 분노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 참담한 결과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례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애기 (Aggie)」라는 제목의 선교관련 전기를 샀습니다. 이 놀라운 이야기에 완전히 빠진 저는 앉은자리에서 그 책을 모두 읽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분노의 마음을 품은 크리스천의 처참한 종말이 어떠한지를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기에 여러분께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1921년에 스웨덴의 스톡홀롬에 사는 두 쌍의 젊은 부부가 아프리카로 가서 선교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은 세계 곳곳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던 필라델피아 순복음 교회의 교인들이었습니다. 특별 파송 예배를 드리던 가운데 이 두 쌍은 현재 자이레인 벨기에 콩고로 가라는 부담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데이빗 (David) 과 스비아 플러드 (Svea Flood), 조엘 (Joel) 과 베르타 에릭슨 (Bertha Erickson) 이었습니다. 4.8피트밖에 안 되는 작은 스비아 플러드는 스웨덴에서 유명한 가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위해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삶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들이 벨기에 콩고에 도착했을 때 지역 선교 본부로 오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오지인 콩고의 벌레들은 사정없이 그들을 공격하는 가운데 그들은 벌채용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데이빗과 스비아는 두 살인 데이빗 2세를 등에 엎고 밀림을 지나 가야만했습니다. 가는 도중 두 가족은 모두 말라리아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위해 순교하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정진했습니다.
오지의 한 마을에 마침내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부족민들은 선교사들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교사에게 "어떤 백인도 이곳에 들어올 수 없고 당신들이 들어와서 우리의 신을 화나게 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 번째 마을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들은 거절당했습니다.
주위에 마을이 하나도 없었기에 지치고 기진맥진해진 부부들은 그곳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글의 중간에 나무를 잘라 개척지를 만들고, 진흙 오두막을 지어 살 곳을 만들었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그들은 모두 외로움과 병과 영양실조에 걸려 신음하였습니다. 어린 데이빗 2세도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주민들과는 거의 교류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6달이 조금 지나고 조엘과 베르타 에릭슨은 선교 본부에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들은 플러드 부부에게도 같이 가지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스비아가 임신한 지 얼마 안되었기에 여행을 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말라리아에 걸린 그녀의 상태가 더욱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데이빗이 "나는 내 아기가 아프리카에서 태어나기를 원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나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플러드 부부는 백 마일이라는 먼길을 돌아가는 친구에게 작별의 손을 흔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 달 동안 스비아는 펄펄 끓는 열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근처의 한 마을에서 오는 작은 소년을 데리고 계속 목회사역을 하였습니다. 이 소년은 플러드 부부가 이룬 유일한 개심자였습니다. 소년은 가족에게 과일을 가져다주었고 스비아가 그에게 가르칠 때면 웃음을 짓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결국 스비아의 말라리아는 매우 심해져서 자리에 누워있어야만 했습니다. 출산 때에 그녀는 건강한 여자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일주일이 채 안되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였습니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이 아기를 에이나(Aina)라고 불러줘요."라고 데이빗에게 속삭인 후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에 데이빗 플러드는 크게 흔들렸습니다. 온 힘을 다해 그는 나무 상자를 모아 스비아를 넣을 작은 관을 만들었습니다. 부족들이 사용하는 관처럼 관을 만들어 산허리에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묻었습니다.
아내의 관 옆에 서서 그의 옆에 있는 어린 아들을 내려보았습니다. 그 때 진흙 오두막에서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순간 마음에 비참함이 가득 차 올랐고 분노가 일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이 상황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분노가 맹렬히 치솟아 그는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왜 이런 일을 내게 하시는 겁니까? 우리는 생명을 바치러 이곳에 왔습니다. 능력 많고 아름다웠던 나의 아내는 이곳에 잠들어있습니다. 27이란 젊은 나이에 말입니다. 지금 제게 남겨진 것이라곤 두 살 난 아들과 갓난 여자아이입니다. 게다가 저는 그들을 돌 볼 능력조차 없습니다. 정글에서 일 년이 넘도록 지내며 이룬 것이라고는 우리가 하는 말을 거의 알아듣지도 못하는 작은 마을 소년뿐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버리셨습니다. 우리의 수고는 얼마나 쓸모 없는 짓이었습니까?"
데이빗 플로드는 부족인을 가이드로 고용하여 아이들을 데리고 선교 본부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에릭슨 부부를 만나자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저는 떠날 겁니다. 혼자 힘으로는 이 아이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스웨덴에는 아들만 데리고 갈 터이니 딸을 맡아 주십시오." 그는 에릭슨 부부에게 키워달라며 딸 에이나를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스톡홀롬으로 돌아오는 길에, 데이빗 플루드는 갑판에 서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하나님께 터뜨렸습니다. 그는 아프리카로 가서 순교자가 될 것이라고 모두에게 말했었습니다. 어떠한 박해를 받더라도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겠다고 말입니다. 지금 그는 낙심한 패배자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생각했으나 하나님은 철저히 그를 무시하는 것으로 보상하였던 것입니다.
스톡홀롬에 돌아와서 그는 수입 회사를 차려 돈을 벌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는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그의 앞에서 '하나님'의 '하'자도 꺼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란 말만 들어도 타오를 듯한 분노가 혈관을 따라 끓어올라 머리 꼭대기까지 뻗쳤습니다. 끝내 그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를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였던 에릭슨 부부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어떤 부족의 족장이 준 독이 든 음식 때문에 죽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에이나는 제 기억으로는, 아더 (Arthur) 와 아나 버그(Anna Berg) 라는 착한 미국인 부부에게 맡겨졌습니다. 버그 부부는 에이나를 데리고 콩고 북부에 위치한 '마시시 (Massisi)' 라 불리는 마을로 갔습니다. 그들은 에이나를 애기 (Aggie) 라고 불렀고 애기는 금방 스와힐리어를 익혀 콩고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았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기 때문에 애기는 상상 게임을 익혔습니다. 그녀가 네 명의 오빠와 언니가 있다고 상상하며 그들에게 상상의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오빠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그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또한 그녀의 언니가 자신을 찾는 상상을 항상 했습니다.
휴가차 버그 부부는 애기를 데리고 미국의 미네폴리스 지역으로 가게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었고 애기는 장성해서 드위 허스트(Dewey Hurst)라는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는 후에 미네폴리스에 있는 기독교 학교 총회인 노스웨스트 바이블 대학(Northwest Bible College)의 학장이 되었습니다.
성인이 된 애기는 그녀의 아버지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애기는 아버지가 재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재혼한 데이빗은 새 아내와의 사이에서 애기가 상상했던 것과 똑같이, 애기 외에 네 아들과 한 명의 딸, 총 다섯 명의 아이를 두었습니다. 지금 데이빗 플루드는 완전히 알콜 중독자가 되었으며 시력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사십 년 동안 애기는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편지를 보내도 답장은 한번도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바이블 학교는 그녀와 남편에게 스웨덴으로 가는 왕복 티켓을 주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아버지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된 것입니다.
대서양을 건너 스웨덴으로 가는 도중 그들은 런던에서 잠시 하차하여 하루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로얄 알버트 홀을 거닐며 산책을 하다가 기쁘게도 선교 집회인 오순절 총회가 그곳에서 열리고 있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회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 한 흑인 목사님이 자이레에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를 간증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벨기에 콩고에 있는 자이레에 대해 말입니다.
애기는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습니다. 모임이 끝난 후 그녀는 목사님에게 다가가 "혹시 데이빗과 스비아 플루드라는 선교사님을 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물론입니다. 스비아 플루드 선교님이 아이었던 저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신 분이시죠. 어린 딸 하나가 있었는데 그녀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제가 그 아이예요. 제가 바로 애기, 에이나에요." 그녀는 소리쳤습니다.
목사님은 애기에게 다가갔습니다.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부둥켜안으며 감격의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애기는 이 사람이 그녀의 어머니가 양육했던 어린 회심자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현재 32개의 선교국과 몇 개의 성경 학교, 120개의 침대가 있는 병원과 110,000명의 크리스천이 있는 나라의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다음 날, 애기와 남편 드위는 스톡홀롬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들이 방문한다는 소식은 그곳에 이미 널리 퍼져있었고 그 즈음 애기는 그녀에게 오빠 넷과 언니 한 명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세 명의 오빠들은 호텔에서 그녀를 반겨주었습니다. "데이빗 오빠는 어디에 있어요?"라고 그녀는 물었습니다. 그들은 웃으며 로비 건너편 의자에 외롭게 앉아있는 사람을 가리켰습니다. 그녀의 오빠, 데이빗 2세는 주름살이 패이고 머리가 희어진 중년의 노인으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아버지는 비참한 마음에 술로 그의 인생을 거의 망쳐버렸습니다.
아버지의 안부를 묻자 오빠들은 얼굴을 붉히며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를 증오하고 있었으며 연락을 끊은 지 여러 해가 지났던 것입니다.
"언니는 어때요?"라며 안부를 묻고 언니의 전화번호를 받았습니다. 바로 전화를 걸자 언니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애기가 자신에 대해 말하자 전화는 툭 끊어졌습니다. 몇 번이고 다시 걸었지만 언니는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언니가 호텔에 나타났습니다. 애기를 부둥켜안으며 언니는 말했습니다. "항상 너에 대한 꿈을 꾸었단다. 나는 세계 지도를 꺼내어 장난감 차를 그 위에 두고 너를 찾으러 곳곳을 달리는 꿈을 꾸곤 했었어."
언니 역시 아버지 데이빗 플루드를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찾는 데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버지가 스톡홀롬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은 스톡홀롬의 빈민지역으로 갔습니다. 무너져 내릴 듯한 건물로 들어가 문을 두드리자 한 여인이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방안에는 술병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고 구석에 놓인 간이침대에 한 사람이 누워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한 때 선교사였던 그녀의 아버지, 데이빗 플루드였습니다. 일흔 셋에 접어든 그는 당뇨병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발작과 백내장에 걸려있었습니다.
애기는 그의 옆에 무너져 앉으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아버지, 제가 아프리카에 떨어져 있던 그 작은 소녀예요." 늙은 아버지는 몸을 돌리고 그녀를 쳐다보았습니다.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나는 너를 버려 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지 너와 오빠 둘 모두를 감당할 수 없었을 뿐이었어."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괜찮아요 아버지. 하나님께서 저를 돌봐 주셨어요."
갑자기 아버지의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돌보신 게 아니다. 그는 우리 가족을 망쳐놓았을 뿐이야! 우리를 아프리카로 보내고는 등을 돌리셨다. 그곳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우리의 일생을 낭비한 거야"라며 그는 격분했습니다.
애기는 런던에서 만난 흑인 목사님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통해 그 나라가 어떻게 변화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전도되었는지를 말입니다. "모두 사실이에요, 아버지. 지금 그 어린 소년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모든 신문에도 그의 기사가 실렸어요."
그 순간 성령이 데이빗 플루드에게 임했고 그는 쓰러졌습니다. 슬픔과 후회의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렀고 하나님은 그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감격의 해후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빗 플루드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 회심했지만 그가 남긴 것이라고는 상처뿐이었습니다. 애기뿐만 아니라 그의 다섯 아이들 모두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며 심적으로 찢기고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습니다.
애기는 이 이야기를 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작업 중에 암에 걸렸고 탈고하자마자 그녀는 주님 곁으로 떠났습니다.
데이빗 플루드의 이야기는 믿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분노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데이빗 플루드는 오늘날의 크리스천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실망하고 낙심했으며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예를 요나서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데이븟 플루드처럼 요나는 선교자의 소명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도시가 40일 후에 파괴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파하러 니느웨로 떠났습니다.
말씀을 전한 후 요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기다리며 산허리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러나 40일이 지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니느웨가 회개하였고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고자 했던 마음을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화가 났습니다. "주님, 당신은 나를 배신하셨습니다. 저에게 이곳에 와서 심판을 전하라는 짐을 지어 주셨고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아무 말도 없이 모든 것을 바꾸셨습니다. 저는 거짓 예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라고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분노했습니다.
요나는 뜨거운 햇빛아래 앉아 화를 내며 하나님께 분개했습니다. 그러나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요나의 거처 위에 나게 하사 뜨거운 태양을 피하게 하셨습니다. 박넝쿨은 그의 머리에 그늘을 주었고 슬픔에서 그를 건져 주셨습니다.
여기서의 '슬픔 (grief)' 란 단어는 '불만과 실망'을 말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요나는 계획대로 일이 이뤄지지 않아 불만을 품고 실망하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획을 바꾸셨고 그로 인해 요나의 자존심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노의 대부분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바로 실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에게 짐을 지어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주권적인 계획에 우리가 포함하지 않고 계획을 바꾸실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우리는 속았다거나 배반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관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에 찬 울부짖음과 혼란을 잘 이해하고 계십니다. 결국 우리의 울음은 인간이기에 나오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울부짖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러나 불평하는 영이 자라게 방치해 둔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서 분노로 자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요나에게 물었던 질문을 우리에게 하실 것입니다. "네가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요나 4: 9).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찌 네가 나한테 화 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나는 "저는 제가 죽는 날까지 성낼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제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요나 4: 9). 여기 하나님께 성나고 분노로 가득 찬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는 "내가 죽건 살건 상관치 않습니다. 나의 사역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습니다. 나의 모든 고난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는 삼일 밤낮을 역한 냄새가 나는 고래 뱃속에서 보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은 나에 대한 모든 계획을 바꾸셨습니다. 나는 당신께 화낼 권리가 충분히 있습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은 요나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화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을 읽고 기도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모든 어려움들이 저에게 일어납니까?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축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은 나를 저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 멈추지 않는 분노를 품고 성내는 것의 가장 큰 위험은 그것으로 인해 당신이 하나님의 위로의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위로 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수도 있습니다. 더 이상 아무도, 아무 것도 당신을 위로할 수 없는 지점에 다다랐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아는 말합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예레미아 31:15).
예레미아가 이 글을 썼을 때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간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의 집은 불에 타 무너졌으며 그들의 포도원은 모두 황폐해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무너져 돌 조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폐허와 잿더미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아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라헬을 자식을 빼앗기고 정신을 잃어 울고 있는 인물로 표현합니다. 그녀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레미아 전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이 통곡하는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의 슬픔에 완전히 빠져 위로 받을 수 있는 상태를 벗어났습니다. 예레미아는 그들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말을 걸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포로로 끌려가도록 허락하셨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증오심을 품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러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문과 불평을 오래 끌고 있을 때, 그 질문과 불평들은 짜증으로 변합니다. 이 짜증은 이내 화가 되고 결국 터질 듯한 분노, 격노로 변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다다르면 우리는 더 이상 타이르거나 충고하는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며 어느 누구도, 심지어 친한 친구나 애인일지라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성령의 탄식에 대해 마음을 완전 닫아버린 것입니다.
과거나 현재, 위로를 거절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아 31: 16). 말하자면 "울음을 그쳐라! 불평을 그쳐라! 나를 믿는 너의 신뢰함에 보상을 줄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린도전서 15: 58).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울음과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겪는 모든 고통과 울음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느냐. 너는 실패하고 파산하여 아무 소득 없는 너의 상황만 보고 있다. 너는 '이젠 끝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나는 너에게 줄 상을 보고 있다. 너를 위해 선하고 놀라운 일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울음을 그쳐라!"
사랑하는 성도와 교역자님들,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의 모든 성냄과 화와 분노를 고치도록 하십시오. 너무 늦으면 그것들이 여러분을 파괴해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서 파괴된 폐허만 보게 될지는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회복을 보십니다. 무너지고 황폐한 곳에 있는 당신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도록 당신을 순종시키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에게 선한 것만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