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만지심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면, 그 사람은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러면 그는 그리스도와 친밀하게되고 그 친밀함으로 인해 하늘로부터 새로운 계시를 받게 됩니다. 그 사람은 끊임없이 붙어 다니는 그의 죄들을 성령 앞에 드러내고 그것들을 극복하길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이제 그의 영은 회복되며 그는 안식의 처소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열정과 더 큰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섬기기 시작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다가오는 심판의 날에 대해 점점 더 분명하게 인식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설 것이며, "너는 타락한 세상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었느냐?"는 중대한 질문에 답해야 함도 그는 알 것입니다. 실로 우리 모두는 심판 날에 이러한 질문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너는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거 하였느냐? 너의 삶과 행동의 방식으로 그를 어떻게 드러내었느냐? 어떻게 너의 삶을 통해 그를 나타내었느냐?"
이것은 우리가 그 날에 어떻게 심판 받게 될 것인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우리가 모세처럼 하나님으로 둘러싸여 있거나, 다니엘처럼 엄청난 계시를 받거나, 바울처럼 구별되어지거나 혹은 베드로처럼 담대하게 설교를 하고 안하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 유일한 기준에 의해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시며 그는 어떤 분인지 우리의 삶을 통해 어떻게 증거 되었는가?
예수님이 그의 교회를 세우심으로 인해 성령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이러한 심판의 기준을 확증하셨습니다. 로마는 그 당시 강국이었습니다. 자만과 오만과 물질주의는 그 제국의 사조였습니다. 로마는 과부, 고아와 가난한 자들과 학대받는 자들을 멀리했습니다. 유브라테스 강에서 대서양에 이르는 모든 길에 있는 많은 기념물들은 로마의 전쟁에서의 승리들을 기념하였습니다. 궁전들은 제국의 전쟁영웅들을 위해 건축되어졌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과 집 없는 이들을 위한 숙소나 시설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온 제국을 통틀어 그 어떤 것도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없었습니다.
이러한 자만과 탐욕의 사조가 유대인에게도 스며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부와 재물을 얻는데 정신이 나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법의 허술한 틈을 이용하여 과부들로부터 집들을 강탈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고아들은 버려졌고, 집 없는 사람들은 능욕을 당했습니다. 하층 노동자들을 속여 그들의 품삯을 차지했습니다. 그들은 이들의 가난은 당연하며 하나님이 그 죄 값을 물으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온 이스라엘에 걸쳐 유행하는 삶의 태도는 "모두가 오직 자신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축재하고, 쌓아놓고, 더욱 구하나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탐욕스럽고 자기 중심적이며 유물론적인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는 그의 영을 거룩하게 남은 자들 위에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홀연히 급하고 강한 바람이 불었고, 집들이 흔들렸으며, 초자연적인 불이 보였습니다. 무식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전혀 배운 적이 없는 방언으로 자연스럽게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사도들은 권능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날 이후로 교회는 예배하였고, 찬양을 드렸으며, 초자연적인 능력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행 2:41-43).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들이 본 것으로 인해 놀랐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온 세계에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이었습니다. 이 성도들은 이제 그의 살아있는 서신들이었습니다. 그의 능력이 그들로 하여금 담대히 증거 하는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모습과 사랑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당신은 기적 같은 일들로 인해 "다 놀라 기이히 여긴" 구경꾼들이 과연 누구인지가 의심스러울 것입니다(2:7). "서로 말하되,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그리고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2:7-8)라고 말하는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 다음 구절이 그 질문에 답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2:9-11).
이 사건들을 목격하였던 사람은 예루살렘 방문객들, 상인들, 무역인들, 여행객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보고는 확실히 세계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체류자들은 어떻게 그들이 목격하였던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방언과 표적과 기사, 훅은 하늘로부터의 바람과 불에 그 초점을 모으고 있습니까?
이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초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주시려했던 증거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이적들은 단순한 표징으로서 신자들의 교화와 치유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증거는 무엇이었을까요?
오순절의 올바른 증거는 성령 부으심의 가장 간과되는 사건들 중 하나입니다.
오순절 사건에 관한 대부분의 설교들이 사도들이 행한 표적과 기사들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혹은 하루에 구원받았던 3천명이란 사람의 수나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인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 중에 가장 위대한 이적이 되었던 한 사건에 관해 듣지 못합니다. 이 사건은 군중들을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강렬하고 명백한 인상을 갖고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적과 기사에 관해 들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이야기의 "놀라운 이적"에 대해 말하기 원합니다. 밤새 수천 개의 매물을 알리는 표시가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의 집들 앞에 걸려있었습니다. 성경은 말하길, "믿는 사람마다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행 2:44-45, 4:34-35).
당신은 예루살렘에서의 그 장면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무수한 가옥과 대지와 농지들이 갑자기 팔리고 있었습니다. 가구, 옷가지, 공예품, 항아리와 접시, 예술작품 등의 가재도구들 역시 팔리고 있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시장에서 또 모든 성문에서 "매물"이라고 쓰인 수많은 방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역사상 가장 큰 중고품 염가판매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소유주가 살고 있는 집을 팔았다는 성경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공동거주지라는 언급도 없습니다. 만일 그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교회에 감당키 어려운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 그리스도인들이 판 부동산과 재산이 필수적인 것들이거나 상속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그들의 가족과 어린아이들을 부양할 것을 명백하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들 또한 그들 가족 중에 60세가 안된 모든 과부들을 돌봐야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집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명령들을 따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그들이 교제를 위해 서로의 집으로 왕래하였다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집에서 떡을 떼며"(2:46). 이 사람들은 아직도 그들의 집들을 분명히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판 재산은 그들의 필요 이상의 것들이었으며, 그들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것들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마 이것들이 그들 소유인들의 마음을 짓눌렀을 것입니다. 그래서 물건들을 팔아 현금으로 바꾼 뒤 교회의 과부와 고아들과 집 없는 자들을 돕는 일에 기증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전파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온 세계에 두루 전파되기 원하심을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수세기 동안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던 물질주의의 사조를 타파할 수 있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가난한 자들을 경멸하였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흔들고 깨웠던 능력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신자들이 자기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던 구경꾼들은 지금 그들이 귀중한 물건들을 팔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물건들은 쓰레기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확실하게 헐값으로 팔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구경꾼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왜 매물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가? 이 사람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을 아는 것인가?"라고 물었어야 했습니다.
만일 가까운 곳에 신자가 있었다면 이렇게 대답하였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메시아에게 드렸고 그의 영이 우리를 변화시켰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가난한 자에게 도를 전하셨고 문둥병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는 과부들을 보살피셨으며 고아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우리도 이와 같이 행해야 한다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와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한 돈을 모으기 위해 이 물건들을 팔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그 온 성안에서 일어났던 대화들을 상상해보십시오. 식당에서, 공회에서, 시장에서, 한 상인이 다른 사람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나는 몇 년 동안 원했던 그 택지를 드디어 사게됐소. 그 땅 주인은 항상 나에게 높은 가격으로 사기 치려고 하였소. 그 사람은 바리새인이었고, 나는 몇 년 동안 그와 흥정을 했소. 그런데 그가 어제 내게 와서는 내게 적당한 가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겠소."
"나는 그에게 무엇이 그의 마음을 바꾸게 했는지를 물었소. 그는 지금은 예수의 제자라고 말했소.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였으며, 또 그는 더 이상 재물을 탐닉하지 않았소. 더군다나 땅을 팔아 생긴 돈은 과부와 고아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는 데 사용될 것이라고 하였소."
이것이 오순절사건의 증거였습니다. 세상사람들은 권능을 받은 신자들이 서로 사랑하며, 그들의 물건을 통용하고, 필요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성령이 그들에게 원했던 바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의 살아있는 증거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이런 증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당신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누구 신지에 대해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한 이유로 교회 안에서 급사를 맞은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그들이 땅을 팔고 받은 금액에 대해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이 성령을 속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부부의 거짓말은 정확하게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가난한 사람을 위해 작정된 돈을 횡령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구매자에게 "당신이 우리에게 지불한 것 모두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용될 것이오. 그것은 과부와 고아들에게 돌려질 것이오"라는 사실을 증언했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돈의 일부를 자신들을 위해 숨겨두었습니다.
심판의 날에 많은 사람들이 자선을 위해 작정되어진 것을 잘못 사용한 것에 대한 책임을 추궁 받게될 것입니다. 저는 911 비극의 희생자들을 위해 수억 달러를 모았지만 그 금액의 많은 부분을 자신들을 위해 횡령한 기관들을 생각합니다. 저는 또한 과부와 고아들을 위해 모금을 하였으나 그것을 잘못 사용한 성직자들을 생각해봅니다. 그들은 국세청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그의 책에 기록하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 배후에 있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에서 그의 아들이 바르게 대변되지 못하는 것을 보고만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회교도들까지도 이런 종류의 증거가 얼마나 중대한 지를 인정합니다. 저는 최근에 팔레스타인 "순교자"[이스라엘을 공격했던 자살 폭파 범들을 포함하여]의 생존하는 가족들을 위해 모금활동을 펼쳤던 사우디 TV의 마라톤 프로에 관해 읽었습니다. 그 프로는 정부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사우디 왕은 가장먼저 270만 달러를 기증했습니다. 왕비는 그녀의 롤스로이스를 기증하였습니다. 한 남자는 신장하나를 바쳤습니다. 한 여인은 그녀의 결혼지참금 17,000 달러를 건네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휠체어를 끄는 어린이들에 의해 들려진 상자 속에 돈을 채우기 위해 한꺼번에 TV 방송국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알라가 그의 어린이들을 사랑한다는 것이 입증되기를 바랬습니다.
그 사우디 TV 프로동안 총 1억5천만 달러가 모금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 외침은 모든 회교권 나라까지 이어져, 팔레스타인 재건을 위한 노력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사단은 효과적인 증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압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자신의 증거를 위해 모조품을 교묘하게 만들어냅니다.)
성령이 예루살렘에서 이제 막 세례 받은 신자들의 심령 안에서 어떻게 이러한 갑작스러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회심은 믿을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그 답은 이 그리스도인들은 말라기 예언의 소산이었다는 것입니다. 말라기는 구약에서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시길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 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 하리라"(말 3:5).
이제 예루살렘의 교회 안으로 빠르게 확장됩니다. 이 신자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교제하였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여기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하셨던 마지막 메시지 중 하나가 마태복음 25장에 있습니다. 성령이 이 특정 메시지를 그의 추종자들의 기억으로 가져왔다고 저는 믿습니다. 실제로 마태는 새롭게 세례를 받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이 메시지를 설교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이 그들의 가슴에서 되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다시는 같은 방식의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갑작스럽게도 그들은 예수님이 진실로 누구이신 지를 나타내는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았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모든 불필요한 것을 찾기 위해 그들의 집안으로 가게 했고, 그 다음 그 물건들을 팔기 위해 길거리에 가져오게 한 것입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마태복음 25장의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 신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랑과 관심의 새로운 마음가짐을 제공하였습니다. 어떻게요? 문자 그대로 그것이 그들을 심판대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이와 같은 메시지가 내 자신의 영혼을 뿌리까지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삶과 사역에서의 변화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게다가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손길을 구하고 예수님을 갈망한다면, 당신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통로에 관한 몇몇 관점에서 당신은 결국 마태복음 25장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더 이상 쉽사리 이 일대 타격을 가하는 말씀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예수님의 예언을 생각하십시오.
여기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비유가 아니고 예언입니다. 그것은 심판의 날이고 우리들 모두는 보좌 앞에 서게될 것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마 25:31-32).
일부 사람들은 "이것은 백성이 아니라 나라들의 심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양의 나라들이나 염소의 나라들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현존하거나 과거 있었던 양의 나라 이름을 하나라도 댈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류의 심판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된 양은 한가지 기준에 의해 판정되어집니다:
"그때에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4-36).
예수님은 "너는 나를 잘 나타내었다. 너는 세상에 내가 죄와 가난의 포로들과 같은 입장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너는 나의 마음을 알았다. 그리고 너는 나로 하여금 너를 통해 나의 본질과 사랑을 드러나게 하였다"고 양을 칭찬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다른 부지런한 행위 혹은 성취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이 한가지에 모든 초점을 맞추십니다.
지금 나를 떨게 만드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마 25:41-43).
여기서 예수님은 간통, 약물남용, 포르노, 동성애 혹은 다른 엄청난 불법에 대해 염소들을 책망하지 않은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저주받을 죄들이며, 그리고 그것들을 범한 사람들은 직접 저지른 모든 행위에 대해 심판을 받게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곳에는 하나의 더 높은 심판의 기준이 있습니다.
제가 이 기준을 저의 자신의 삶에 적용하면서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이 예언 안에서 나 자신을 찾을 수 없다. 언제 나는 이 명령된 것들을 행하였을까? 나는 굶주린 자, 집 없는 자, 과부들, 고아, 죄수들, 학대받는 사람들에 대한 실질적인 사역을 부인한 적이 있었는가? 나는 어떻게 여기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루고 있는가?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25:45-46)."
수개월 간 저는 과부들, 고아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보험금을 더 이상 지불할 수 없거나 집을 가질만한 여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편지들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당신은 만군의 주이십니다. 그들을 먹여주십시오. 그들의 필요들을 들어주십시오." 드디어 주님이 저에게 응답해주셨습니다, "데이빗, 너는 그들을 위해 기도 이상으로 무언가를 해야한다. 너는 할 수 있다. 너는 그들을 먹여라. 그것은 네 힘이 미치는 곳에 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어느 누구도 선행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선행들을 했느냐 안 했느냐에 의해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논점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내가 얼마나 많이 먹이고 입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심적인 논점은 이렇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한 뒤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가? 나는 축재하고 물질을 모으는데 시간을 사용하는 것에 의해 예수님을 잘못 드러내고 있지는 않는가? 나는 가난한 자들과 무기력한 자들을 향해 나의 눈을 감고 있지는 않는가?"
죄로 저주받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증거는 전도와 증명, 즉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 모두를 다 포함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과 우리의 구제사역은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처럼 그와 같은 행위들은 복음의 능력을 증명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 2:14-16).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예언에 대해 두 가지로 반응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모진 분이 아니다. 이것은 모두 최후 심판 때의 가르침이다. 나의 하나님은 너무 사랑이 많으시기 때문에 엄하게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쉬운 복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너무나 엄하고, 엄격하다. 나는 그렇게 불안하게 하는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전혀 그것에 도달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어려운 복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두 가지 복음주의자들은 요지부동하게 그들 자신의 방법만을 고수하고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불신자들을 위한 연출을 재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회 모임을 개최하고, 하나님께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줄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탄절에 우리는 빈궁한 가족들에게 바구니들을 나누어줍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거지들에게 몇 푼의 동전을 슬쩍 넣어줍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명령하셨던 것처럼 하겠다는 전적인 헌신과 실질적인 전념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은 양으로 확신하면서 심판대 앞에 설 것이나, 염소들과 같이 따로 분리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울부짖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여, 주여 이것은 너무나 예기치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당신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했고, 금식했으며, 우리는 교회에 갔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구원받은 양입니다." 왜 이들을 염소와 같이 구분하십니까?
만일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그의 것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것일 수 없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만일 우리가 탐욕하고, 더 많은 것들을 추구한다면, 우리들은 그의 양이 아닙니다.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10).
하지만 이런 신자들이 염소로 구분되는 것이 그들의 물질을 향한 정욕 때문이거나, 그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않은 바로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세상에 잘못 드러내었기 때문에 염소이다. 너희들은 불신자들에게 나를 번영, 돈, 성공과 동일시하게 하였다. 너희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가 그들이 부유해지는 것을 원했다고 말해 그들을 속였다. 그리고 너희들은 병든 이들에게 그들이 믿음이 부족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을 축복하였다. 나는 너희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가진 것을 너희에게 부어주었다. 그러나 너희들은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에 너희들은 너희 재산으로 목구멍을 채웠다. 만일 너희들이 나의 것이라면 - 만일 너희들이 나를 사랑했다면 - 너희들은 나의 명령에 복종하였을 것이다."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데이빗 형제여, 이건 너무 어렵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그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에스겔서를 읽어보십시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 ... 또 그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에게 손 내밀지 아니하였다." (겔16:49, 이탤릭체 부분은 작자역). 하나님은 소돔을 심판하셨을 때 그들의 동성애나 우상숭배를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교만함, 안락함과 궁핍한 자들을 무시함이 전부였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단 한번만의 염가 판매 시장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그의 백성들의 마음으로의 그 무엇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는 물질에 사로잡히지 않고, 타락한 세상에 그의 마음을 드러내어줄 증인들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집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가 깨어서 우리가 얼마나 소유에 집착하고 있는지 알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은 어떻게 궁핍한 사람들과 관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령의 하시는 일입니다. 만일에 당신이 이 메시지에 찔리신다면 그에게 가십시오. 주님은 당신이 만나려는 빈궁한 자들과 실제적인 구제사역 중 하나로 직접 당신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유죄를 선고하거나 비난받게 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당신이 예수님의 말씀의 빛으로 당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을 도와주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우리중 누구에게도 그것을 모두다 하기를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이 우리가 개인적으로 이러한 구제의 분야들 중 적어도 하나와 실제적 관계를 갖기를 원하는 것을 압니다. 당신은 당신이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입히는 것을 돕고, 옥에 갇힌 자를 찾아가고, 과부와 고아들을 축복하거나 찾아가는 것을 알고 있기에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 앞에 설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령은 제가 이 판결된 진리를 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또 그는 그 어떤 신실한 신자라 해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말씀하십니다. 병자나 나이가 지긋하거나, 허약한 사람들조차도 집 없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들은 갇힌 자들에게 편지도 쓸 수 있습니다.
이 명령에 순종할 마음이 있을 때 성령은 그 길을 보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관계할 때, 그는 이것을 약속하십니다.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은 것이라"(사 58: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