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율법의 마침

Gary Wilkerson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로마서 10:4).

우리 삶에서 내려놓아야 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 죄, 습관, 그리고 문제를 일으키는 상황 등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이 모든 부분들은 우리를 쉽게 지치고 곤하게 만듭니다. 모두 내려놓아야 할 삶의 일부입니다.

성령님께서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의에 대한 갈망을 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모르는 또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까지 말입니다.

사탄의 죄에 대한 유혹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죄악 중에 살아가고 있으며 생각이 더럽혀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죄악을 이기고자 하는 원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정결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을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강렬한 의와 정결에 대한 갈망을 심어 주십니다.

전적으로 믿음을 공격하는 전투

David Wilkerson

오늘날 교회를 향한 사단의 위협은 이 땅에 부어지는 더러움의 홍수보다 더합니다. 그것은 물질주의, 중독, 심각한 유혹을 넘어섰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믿음의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 찾으려 할수록 사단의 공격은 더 집요해집니다.

최 근 들어 주님의 사도들로부터 그들의 생각을 공격하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신실함에 대해 괴롭히고 의심하게 하는 질문들로 홍역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은 더 나아가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워하며 “더는 못하겠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 든 한 살의 여인이 “내 남편은 뼈암으로 고생 중이고 아들은 에이즈로 죽어가며, 저는 당뇨로 서서히 쇠약해지고 있어요.”라고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이 가정이 겪고 있는 상황을 다 읽으면서 저는 머리를 흔들고 고민했습니다. “이 분은 어떻게 기쁨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이 겪기에는 너무 힘든 것 아닌가. 분명 하나님께서 그녀의 믿음에 사정을 봐 주실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알 수 없는 수수께끼

David Wilkerson

마가복음 4장 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라고 합니다. 집으로 돌아간 대부분 군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해보십시오. 이웃들이 몰려와 예수님께서 어떤 말을 했는지 물을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어? 배운 것을 말해 봐.” 예수님의 비유를 반복해서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말은 아마도 생명력이 없고,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능력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일이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에 일어나고 있다고 믿습니다. 강단에서 전하는 말이 성령님의 계시나 죄에서 구하는 힘이 없는 죽은 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성령님의 생명력 없이 들은 말을 되풀이할 지 모르겠습니다. 배움에 목말라 하던 제자들과 군중의 얼마나 극명한 대조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삶의 변화시키는 계시를 원하는 남방 여왕의 신하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진실을 향한 갈망

David Wilkerson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12:42).

오 늘날 우리 모두는 결정적인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솔로몬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우리 곁에 있다면, 그가 우리를 혼돈 속에 놔둘까요? 그의 지혜가 항상 가까이 있다면, 남방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열정적으로 구한 것 같이 우리도 그래야 하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은 오늘도 그의 백성에게 이야기하십니다. 구약이나 제자들에게나 초대교회에 그랬던 것 같이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듣는 귀를 가진 사람에게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 가복음 4장 2절에서 보면 예수님은 비유로 많은 것을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밭에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나면, 군중은 당황해하며 궁금해했습니다. “도대체 이 씨뿌리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씨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는 새, 사단, 가시떨기, 옥토는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의 의미

Gary Wilkerson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구원할 뿐 아니라 양육시켜줍니다.

“모 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디2:11).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바울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했습니다. 더 얘기할 것이 있을까요?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바울은 재빨리 이와 같은 은혜가 “경건하지 않는 것을 버리도록 양육하신다”(디 2:12)고 덧붙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묘사하는 것은 주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건하지 않거나, 세상적인 욕심, 이기적인 마음, 현재 우상 숭배하는 것을 버리는 것을 요구합니다(디 2:12).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한 삶뿐 아니라 현재의 풍성한 삶도 공급해줍니다. 주님 안에 거함으로서 복되고 신성하며 평안한 삶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자욱한 혼돈

David Wilkerson

지금 이 메시지를 읽는 크리스천들 중에 혼돈과 혼란에 빠져있는 분들은 몇 명이나 될까요? 혹시 당신이 지금 혼돈과 혼란에 빠져 있습니까? 응답 받지 못한 기도가 있으십니까? 멈추지 않는 우울감에 빠져있습니까? 말로는 표현 안될 일들을 겪고 계신가요? 당신의 삶과, 상황 그리고 사람들에 의하여 실망하였습니까?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며,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였는지 찾아보고 있습니까? 우울하고, 절망에 빠져있으며, 분별을 할 수가 없으며, 여기서 어떻게 헤어나와야 할지도 모르시겠습니까?

당신은 성숙된 크리스천이며, 수년동안 진리의 말씀을 들으며 성장하여 왔지만, 지금 자신을 의심하며 자신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때 경험해봤던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혹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화나 계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빛으로 걸어가는 삶

David Wilkerson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요한복음 12:35). 여기서 어두움이 의미하는 것은 “영적 시야가 가리워지는 것, 혼돈, 불명료함, 우울”입니다. 처음에 저는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두움이라니?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그러한 어두움에 붙잡힐 수 있을까?”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빛의 물결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50년 이상 사역하는 동안 저는 하나님의 능력이 영적인 사망에 놓인 사람을 일으키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였습니다. 마약 중독과 술 중독이라는 무덤에서 생명으로 걸어가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십자가와 칼이라는 책에 기록한 모든 것은 오직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내용입니다. 평생 사역을 하면서 저는 죽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David Wilkerson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마태복음 18:32-33).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나는 나의 형제들의 용서하는가?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가?” 내가 용서받은 것과 같이 나의 형제들을 사랑하며 용서하기를 거부한다면 예수님께서 나를 “악한 종”이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제 가 하고자 하는 말을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우리가 죄를 허용하며 타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은혜에 대하여 담대하게 전하였지만 디모데에게 이렇게 지시하였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디모데후서 4:2). 우리는 순전하고 진실된 말씀의 담대한 수호자(guardian)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놀라운 사랑

David Wilkerson

심판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종들, 그리고 하나님께 많이 용서받은 사람들이 왜 그들의 형제들과 교제하기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자, 이 문제는 가장 근심스러운 죄에 근본이 있습니다. 그 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이렇게 결론을 지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인정하는 데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던 시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율법주의 적인 믿음으로 살았고 그런 설교를 전하였습니다. 저는 거룩함을 추구하며, 그것을 율법주의적인 기준에 맞추어서 살아가기를 노력함으로써 얻을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내가 삶에서 해도 되는 일 또는 하면 안 되는 일의 목록만 가져다 주었습니다.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Gary Wilkerson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요한복음 15:2).

과 실을 맺는 크리스천들의 가지가 가지치기를 당했습니까? 사실 열매가 달린 나의 가지가 제거되는 것은 평생을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보상은 아닙니다. 우리들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하나님께 어떤 보상을 받고자 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게 공평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