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시간

David Wilkerson

하나님의 의의 불길을 다시 키울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믿음으로 바로 서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높일 사람들이 아직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검게 그을린 심지를 볼 때에 나는 그 불씨를 끄지 않을 것이다. 불길은 사라져서 불이 보이지 않더라도 작은 잿불이라도 보인다며 그 불씨를 완전히 꺼버리지 않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작은 목소리라도 신실하게 부르짖는 나의 종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나는 그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할 것이다.”(이사야 42:3 참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지금 ”자비의 시간"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특히 유럽을 여행할 때는 이 사실을 더욱 더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 대륙은 미국보다 더 타락하였고, 선택적으로 하나님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버렸습니다. 유럽의 어떤 나라들은, 길을 걸을 때 쉽게 적그리스도와 하나님을 향한 오만한 태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상한 영혼

David Wilkerson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하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세금과 법으로 인하여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욕심 많은 사제들은 과부와 가난한 사람들을 약탈하며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혹사당하는 노동자들은 조롱 받았고 업신여김을 받았고, 수많은 사람들은 타락에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예수님께서 큰 빛을 가지고 어두움의 시간에 오실 것이라는 수많은 선지자들의 예언을 충족시켜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선과 죄악이 만연하는 사회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현 상태를 보시고는, 예루살렘은 곧 황량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시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울부짖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회에 70여년 동안 복음을 전해들을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 나라로 부름 받은 성령충만한 증인들이 소망, 회개의 말씀을 전하며 기사와 이적을 일으키며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한 갈대인 이스라엘을 그렇게 쉽게 꺾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심판 받는 아메리카

David Wilkerson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미국을 아직 심판하지 않으신 겁니까? 왜 죄에 대한 값을 치르게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노아의 시대에는 120년 동안 경고를 하시다가 이제 더 이상은 안되겠다고 판단하시고 홍수를 내리셨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미국의 죄를 오랫동안 견디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미국을 의로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저는 미국을 사랑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미국에 닿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저 하나님의 심판이 지연되는 것에 놀랄 뿐입니다.

사실은 저 또한 오늘날에 심판의 초입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온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끔찍한 재난들이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가 아직 붕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나라는 있는 그대로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미국은 위기 때마다 넘어지기도 하지만, 오직 은혜로 인하여 다시 일어날 기회를 얻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새로운 계시

David Wilkerson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이사야 42:1-4).

이 말씀은 온전히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령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감동을 주셔서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시작문구는 이렇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이 문구는 듣는 이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해 줍니다. “메시야에 관한 새 계시를 듣기 위한 준비를 하라.”

이 구절들이 연상하게끔 하는 장면은 아주 명료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도록 강요하려고 오는 것이 아니고, 떠들썩하고 거창한 소리와 함께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정하고, 애정 어린 구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굶주린 아이들

Gary Wilkerson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무리들을 필요한 것들이 충족되지 않은 아이들을 보살피듯이 섬기셨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피를 흘리는 여인을 치유하시고, 배고픈 무리를 먹이신 순간들에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게 만들었고, 심지어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 때문에 그를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저 또한 개인적으로는, 제 가장 깊은 필요를 예수님께서 충족시켜 주셨을 때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십대 청소년인 저로서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저는 대대로 내려오는 목회자의 집안에서 자라왔지만, 저의 믿음이 부모님으로부터 반복해서 전해들은 가르침 때문인지 실재인지 확신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상한 저의 영혼을 만나주시고 내 안에 오셔서는 제가 필요로 하는 사실들을 보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부처도 무하마드도 공자도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된 하나님의 사랑을 나에게 보여주셨고, 그것은 나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David Wilkerson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그의 교회와 수확을 그리면서 믿는 사람들의 뒤돌아섬을 보셨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퇴보를 보시고 그의 영은 상심할 것입니다. 풍부한 수확하는 대신에, 믿는 사람들이 시간과 힘을 세상적 성공과 물질에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이들이 수확을 거두지 못할것입니다. 익은 들판이 잠자듯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천군 천사를 보내 수확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의하시고, 갑자기 수천 개의 천인이 지구에 나타나 초자연적인 빛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광경입니까! 영광의 옷을 입은 초자연적 존재가 교회와 공공장소에서 말하는 광경입니다. 그들은 신문이나 라디오, 텔레비전 기자들에 의해 인터뷰를 합니다. 십자가, 부활, 승천, 하나님의 사랑과 마지막 올 심판에 해 이야기 합니다. 매끄러운 말솜씨와 확신으로 말하지 때문에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많은 요나와 같이 세상에 경고를 합니다.

추수할 시간

David Wilkerson

예수님께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라고 선포하셨습니(마9:37-38참조). 예수님 세대의 그때, 놀라운 마지막 영적 추수가 유대인과 이방인사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그 추수가 지속될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때에 무엇이 “추수할 때가 되었다. 이제 거두는 때이다.”라고 할 수 있게 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이스라엘에 영적인 깨어짐을 보신 것일까요? 회당에 회복이 있었을까요?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회심했을까요? 바리새인들이 회개로 깨우쳤을까요? 무엇 수확할 때가 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었을까요? 

추수에 쓰이는 도구

David Wilkerson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마태9:36–38).

예수님께서는 “수확을 해야 하는데 일꾼은 적다”라고 간단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왜 일꾼이 적은 것일까요?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이라고 주장하는 신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많은 돈이 예배당을 세우는 데 쓰여집니다.

영혼을 수확하는 능력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우리가 설교하는 복음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반영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을 일꾼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 진실 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이 주님의 약속은 사실인 것을 이 세상에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섬기는 마음

David Wilkerson

 

바울은 한때 모든 동료와 바리새인들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고 자신을 정결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땅에서 명망 있고 다른 이의 눈에 흠잡을데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4-5).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잡았을 때,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내 삶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노력하고 경쟁하는 것을 내려놓았다. 주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온전히 알게 되었다”라고 계속 말합니다.

한때 바울은 자신의 종교적 야망, 열정, 경쟁의 영, 바쁨들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 그것이 자신을 향한 육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주는 삶

Gary Wilkerson

아버지는 주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나눌 줄 알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주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주는 삶으로 가족의 이름을 물려받으라고 손짓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놀라운 그림을 제시해주십니다. 떡과 포도주를 들어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리는 나의 피니라’(막 14:22-23)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떡에 축사하시고 떼어 나누어 주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주님은 부어주는 삶이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축복되어지고 부서졌으며 나누어졌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필요를 채우는 것이 주목적인 보통 사람과 다른 이를 위해 삶의 목적은 찾고 부어주는 사람의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주님 안에서 저희는 ‘받는’ 삶에서 ‘주는’ 삶으로 전환하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육적인 영에서 주님의 신실한 영으로 바뀌는 데 필요한 힘을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나에게서 받은 축복을 다른 이들에게도 나누어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