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

David Wilkerson

사도행전은 놀라운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마지막 두 구절은 로마 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사슬에 묶인 채 자택 구금된 바울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바울의 상황을 희망적으로 묘사한 구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0–31).

그리스어의 “금지하다”라는 말은 사실 “방해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미국 표준역 성서에는 바울이 “온전히 방해받지 않고” 설교하며 가르쳤다고 합니다. 바울이 구금상태인 것을 볼 때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복음은 멈추지 않고, 가로막지 않는 의미로 “방해받지 않아야” 합니다. 저자는 “복음은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놀라운 이 간증을 사도행전을 끝맺는 데 사용했습니다.

두려움을 위한 예수님의 처방전

Gary Wilkerson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패배를 받아들인 것 같이 살고 있습니다. 믿음보다는 의심으로 생각이 지배되며 습관적인 죄 행동양식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믿음은 자신에게만 보이며 “내가 이렇게 허우적대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겠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이 없는 삶을 사는 기독교인의 모습입니다.

사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 처음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제자들의 두려움을 처리하셨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

하나님의 집을 향한 질투

David Wilkerson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그는 말씀하셨다. “나의 아버지집을 향한 열정이 나를 삼켰다” (요한복음 2:17). 그러나 그의 사데 교회를 향한 그리고 지금 우리를 향한 메시지는 “너는 나의 은혜를 즐겁게 받아서 좋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너는 강력한 예배와 말씀으로 복된 교회였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에 너는 생각했다. “우리는 다 왔다” 그래서 안도했다. 너는 더 이상 경계심을 잃어버렸고 무관심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적인 comfort zone으로 들어가 정착하게 되었다. 너는 내가 준 사명을 이루려고 나아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집을 우리가 먼저 생각지 않았을 때 어떤 일들이 생기는 지를 보여준다. 학개에 더 자세하게 나와있다.

죽은교회

David Wilkerson

사데교회는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그리고 위대한 사도적인 능력으로 시작됐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그리스도는 사데의 사역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의 교회가 엄청난 명성을 가지고 시작됐지만 내가 준 생명을 내어버렸다. 너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라. “너는 죽었다. 너는 이 말을 듣고 받아들이고 다시 깨어날 수 있는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만약에 주께서 죽었다고 말하면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직 그 교회 안에 깨어 있는 거룩한 남은 자들이 있다고 한다. 주님은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요한계시록 3:4)

예수님께서 “옷을 더렵혔다”는 것은 영의 죽음을 말한다. 무엇이 사데교회의 성도들이게 영적인 죽음을 불러 일으켰는가? 그들의 마음에 “특별한 관심”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관심이 있었다: 자선과 선교, 그리고 몸된 교회를 위한 신실한 모임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의 일이 그들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그들 자신만의 관심사를 쫓아가고 있다.

조용하고 작은 음성

David Wilkerson

우리들의 영혼의 적들처럼, 우리의 육체의 함성도 들려진다. 그 함성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 한 명의 친구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결정을 축복하실 거라고 그러니까 가끔씩은 그 욕망을 들어줘도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또 다른 크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다. 성령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육체를 대적해서 싸운다고 성경은 말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17)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직 성령만이 육체를 멸할 수 있다.

성령의 음성은 우리들에게 그의 말씀을 기도 가운데로 가지고 나아가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확인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이 말씀을 받았다. 그리고 이 말씀은 모든 크고 작은 문제들 가운데서 늘 유용하다.

사단이나 육체가 마치 홍수처럼 몰려올 때에 성령님은 항상 일어나셔서 적을 무찌르신다, 만약에 우리가 그를 신뢰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성령의 보호하심

David Wilkerson

“어떻게 나는 다른 음성이 아니라 성령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라고 많은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먼저, 성령은 자신의 의지를 전적으로 성령님께 맡기지 않은 사람을 다스릴 수 없다. 성령님은 그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신다. 그런데 성령과 동행하는 것을 생각할 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만약 성령과 동행하는 것이 내가 그의 음성을 듣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는 완벽한 자신감을 필요로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 속고 있지 않는지 점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나 자신의 음성이나 마귀의 소리가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듣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

많은 기독교인들이 과거의 안 좋은 경험 때문에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의심이 많다고 느낀다. 그들은 “어떻게 성령님께서 말씀하신 다는 것을 아는가? 나는 지나 번에 분명히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어. 속은 기분이 들어.”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하셨어. 하나님이 저렇게 말하셨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겪는 불편한 기분 때문에 이런 일들에 관심을 끊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Gary Wilkerson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린도전서 15:16-19)

십대일 때 나는 하나님에 대해 의심했고 다른 종교들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 당시에 나는 바하교의 교리가 마음에 들었는데 왜냐면 기본적으로 모든 종교는 진리이고 모든 믿음은 우리를 천국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바로 나는 위대한 기독교 저자인 C. S. Lewis의 책들을 읽었는데 나의 대충 대강 이해하던 생각들을 바로잡아 주었다. 그는 모든 기독교에 대한 생각은 한 질문에 기반한다고 썼다: 부활은 과연 있는 있는가?

성령과 하나님의 약속들

David Wilkerson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다음의 약속들을 생각해보고, 이 약속들에 대한 당신의 응답이 “예와 아멘”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1. 주께서 당신을 성령으로 바로 세우셨고, 인치셨고, 채우셨고, 감동시키셨습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린도후서 1:21-22).

성령이 당신의 마음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아니하면 성령으로 행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가 잘못을 했을 때에도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실은, 우리는 잘못을 하였을 때 옳을 일을 할 때만큼 성령을 필요로 합니다.

그냥 “예(YES)”라고 말해요

David Wilkerson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갈라디아서 5:25).

성령으로 행한다는 바울의 구절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성령으로 행한다는 의미를 나에게 명료하게 이해시켜 주옵소서.” 성령께서 제게 이렇게 응답하여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으로 행한다는 의미는 결코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신학적 훈련을 요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은 너무 간단해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진리는 깨닫는다면 우리는 혼돈 없고 평안으로 가득 찬 명확한 삶의 방향을 가진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제게 다음과 같은 간단한 문장을 제 뇌리 속에 심어 주셨습니다: “그저 ‘예’라고 말해요.”

그저 순종하면 됩니다!

이 문장이 의식 중에 스칠 때에 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정말 간단하군요. 그러나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도록 해주세요.”

구름을 따르는 것

David Wilkerson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유진하고 진행치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진행하였으니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고 또 모세로 전하신 여호와의 명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민수기 9:22-23).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였던 구름은 결국에 천국으로 들려 올려 졌습니다. 그러나 수 백 년 후에 다른 구름이, 예수살렘의 다락방에서 내려왔습니다. 성령- 즉 광야의 성막 위에 머물렀던 같은 영-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120여명의 예배자들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이 구름은 성막 위에 있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까지 내려와 사람들의 머리 위에 굳게 결합된(cloven) 불길의 언어처럼 머물렀습니다.

굳게 결합된(cloven)라는 그리스어의 의미는 “빈틈없이 분포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구름이 분리되어 다락방에 있는 각 사람에게 나뉘어 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 같은 구름은 각 사람의 마음과 육신을 사로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