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생각하십니다

David Wilkerson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편 40: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예레미야 29:11).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태중에 있을 때도, 태어난 순간에도 당신을 위해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편 139:16).

방심할 틈이 없습니다

David Wilkerson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 중 “선한 싸움”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계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마음이 지쳐서 “지금 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요! 믿음은 지킬 것이고 쉰다고 해서 하나님을 덜 사랑하지는 않을 것이니 마음이 시키는 대로 일단은 잠깐 쉬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닙니다! 영적인 안일함과 포기는 마귀의 덫에 빠져 그대로 먹잇감이 되는 길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로마서 13:11-12).

밝혀진 미스터리

Gary Wilkerson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요한의 주요 복음전파 대상은 그리스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예수님을 그리스어로는 로고스(logos) 즉, ‘말씀’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수 백년 동안 ‘로고스’에 대한 연구를 해왔습니다. ‘로고스’는 지혜, 지식, 철학, 삶의 참된 의미를 뜻합니다.

요한은 고민을 하는 그리스인들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삶의 참 의미를 알고 싶습니까? 삶의 목적을 알고 싶습니까? 당신이 찾고 있는 로고스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여러분이 찾는 로고스입니다. 당신들은 지식을 찾고 있지만, 로고스, 즉 참된 지식과 삶의 지혜는 온전히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Carter Conlon

당신은 자신의 기도에 무언가 결여되었으며 왠지 깊이가 없고 당연히 있어야 할 효력이 없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결국, 기도는 인간적 노력으로 주도된 기도와 진정으로 하나님께 속하는 신성한 기도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명한 스코틀랜드 개혁가 존 녹스의 기도를 숙고해봅시다. 그는 산꼭대기에 서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스코틀랜드를 저에게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제가 죽겠나이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이 하나님께 자복하며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기도를 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제 가정을 축복해주시옵고, 저희의 제정, 부모님, 그리고 자녀들을 축복해 주십시오.” 라는 단순한 기도제목을 갖고 날마다 하나님 임재 앞으로 나오는 것을 넘어서는 기도 말입니다. 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기도,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생명으로 돌이키는 기도를 하기 원합니다! 저는 또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하도록 명하셨던 기도를 원합니다. “너는 생기를 향하여 이 마른 뼈들과 사망한 자들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에스겔 37:9) 이것이 바로 제가 하기 원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녀들을 보살피신다는 증거

David Wilkerson

머리카락! 우리 머리의 모든 머리카락은 우리 천부께서 세고 계십니다. 약 십만 개에서 십오만 개의 머리카락이 인간의 머리를 덮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관상을 위해서뿐 아니라, 여름과 겨울에 우리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눈썹은 땀이 눈 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며, 속눈썹은 먼지나 미생물들로부터 우리 눈을 보호합니다. 귓속과 콧속의 미세한 털들은 우리 몸으로 들어오는 공기속의 이물질을 걸러냅니다.

만일 우리가, 머리카락이 얼마나 놀라운 창조인지, 그리고 얼마나 생명으로 가득한지를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것들을 세고 계시다는 사실을 절대 의심치 않을 것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말한 것은 지당합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내 영혼이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잘 아나이다.” (시편 139:14)

그분은 참새 한마리도 보고 계십니다

David Wilkerson

뉴저지의 한 시골 길을 걸어 올라가는 동안 저는 주님과 뜻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주님, 저는 온갖 종류의 두려움과 걱정들을 지닌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과연 미래가 안식과 기쁨, 그리고 단순한 신뢰를 포함하고 있는지를 알기 원합니다!”

성령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두려움과 근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한 비결은 참새들이라는 단어에 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라.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마태복음 10:29-30) 이 말씀은 지극히 근본적이며 지극히 단순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요점은 매우 심오합니다.

구약에서 다윗왕은 이렇게 단언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시편 34:4) 어떻게 다윗은 두려움으로부터 그러한 자유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의 위대하심의 비전을 갖고 만물의 창조주를 바라봄으로써, 그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알았습니다!

올무는 끊어졌습니다

David Wilkerson

바울은 디모데에게 쓴 서신에서 사탄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는 마귀의 함정이나 올무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디모데전서 3:7) 그리고 그는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디모데후서 2:26)

이 두 구절에서 사용된 “올무”라는 단어는 목의 올가미를 준비하는 모함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잘 구상된 올무를 뜻합니다.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 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나이다.” (시편 140:5) 사탄이 우리를 위한 교수대를 세우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수년 전 뉴욕타임스 신문에서 수갑을 찬 한 전도사의 사진이 일면 기사로 나왔습니다. 그는 울며 황당해 했고 사슬에 묶여있었습니다! 사탄은 잘 구상되고 계획된 올무를 이 형제에게 씌었던 것입니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

David Wilkerson

주님은 그들이 비록 모든 것을 잃은 고통 가운데 처해있다 하더라도, 믿음을 지킬 자들을 원하십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히브리서 10:32, 34)

이것은 “빛을 받은 후에” 큰 환란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의 소유물은 없어졌지만, 그들의 눈은 더 “영구한 산업”에 있었으므로, 믿음은 그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 땅의 모든 소유를 잃었다면, 당신의 신뢰를 저버리겠습니까?

예수님을 올바로 안다는 것

Gary Wilkerson

지금 교회와 세상이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야 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을 올바로 안다는 것”에 대한 제 말의 의미는, 사랑받기를 원하는 모든 갈망, 이해와 인정을 받고 싶어 하며, 가치와 의미, 그리고 목적을 갖고자 하는 모든 소망 등, 인간의 필요와 열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근원을 뜻합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 문화는 아메리카 우상적 유명세에 완전히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돈이나 근사한 외모, 또는 인기도에 의해 만족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로서,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은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종종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우리 자신의 이미지로 축소하려 합니다. 우리 중 다수는 우익파 공화당 예수님, 또는 자유파 민주당 예수님 등, 우리에게 걸맞는 예수님을 원합니다. 우리는 흑인과 백인 그리고 황인 예수님을 원합니다.

아버지의 사랑

David Wilkerson

신약성서에서는 징계(교육적인 꾸짖음)에 대하여 많이 언급되었습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브리서 12:5-7).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며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요한계시록 3:19).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1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