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부흥

Jim Cymbala

유창하고 능숙한 설교의 영향으로 부흥이 일어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만일 당신이 이전에 있었던 부흥회를 타이머로 쟀다면, 설교보다는 기도와 눈물, 그리고 회개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할애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1857-59년에 있었던 “기도 부흥 모임”에서 실제로 설교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이 기도 모임이 미국 역사상 그 어느 영적 각성보다도 더 많은 추수를 거두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온 나라 인구는 삼천만 정도였는데, 미국 전역을 걸쳐 백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전환했다고 추정됩니다. 그 숫자는 오늘날의 인구에 비례했을 때, 구백만 명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회개한 것과 비례합니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당시 이곳 뉴욕에는 제레미야 렌피어(Jeremiah Lanphier)라는 한 조용한 사업가가 있었는데, 그는 뉴욕시에 있는 한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에서 수요일 정오 기도 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맨 첫주에는 여섯 명이 나왔고, 그 다음 주에는 스무 명, 그 다음주에는 사십 명이 나왔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날마다 기도 모임을 갖기로 했습니다.

단 한발 짝의 걸음

David Wilkerson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구하고, 내 시간과 돈을 하나님의 일에 쓰고,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고 온전한 믿음으로 헌신하면서도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에 불순종 할 수 있을까요?

마음들여 하는 일

David Wilkerson

기도와 겸손 그리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 들여” 일하게 합니다.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느혜미야 4:6). 진정한 거룩한 믿음의 부흥은 일꾼들을 생산합니다. 책들과 세미나 그리고 강좌들은 그렇지 못하나, 부흥은 반드시 일꾼들을 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안에서 일하실때에 사탄은 항상 그를 방해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느혜미야 4:7-8).

이스라엘의 원수된 자들은 매우 분노하여 방해하기 위하여 힘써 모략을 계획했습니다! 그들은 예상치 못할때에 은밀하게 우리 안에 침투합니다. “우리의 대적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달려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11절).

하나님께서 내 안에 일하고 계신다!

David Wilkerson

1986 년도에 저는 뉴욕시의 타임스퀘어를 거닐며 이곳의 죄악 때문에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텍사스에 있는 집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1년여 간을 애통하였습니다.그때 하나님께서는 제게 폐허가 된 그곳에서 일을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저는 절망스런 폐허를 직접 보았으나 성벽 재건의 희망을 갖게 될 때까지 제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폐허가 된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당신의 성벽에 수리되어야 하는 훼손된 부분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반석이신 예수님께 우리가 넘어져 깨지며 산산조각 나는 것은 사실 좋은 일입니다. 영광스런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자신은 산산조각 날 것입니다. 심지어 여러분이 생각하는 재능, 능력 그리고 돈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의미 없이 깨져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만 홀로 일어서 이 큰 이상을 볼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 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다니엘 10:8). 상하고 깨진 심령은 육체적 능력과 힘이 모두 산산조각난 상태입니다. 죄의 현실을 완전하게 깨달은 것을 의미합니다.

깨진 마음

David Wilkerson

한때 저는 제가 깨진 마음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픔을 충분히 겪었기 때문에 알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성령님께서 내 마음 문을 여시고 그 말씀의 깊은 뜻을 다시금 깨닫게 하셨습니다.

마음이 상하고 깨졌다는 것은 울고, 슬픔에 가득차고 영혼이 상처 입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울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마음이 상한 자들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신음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깨지고 상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실로 깨지고 상한 마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맡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을 마음에 채워주십니다. 병든자를 치유하는 것보다,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보다 강력한 힘을 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제 마음 속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절망의 때에 내가 너의 마음 안에 능력을 더하여 주고자, 하나님께서 보시는 상하고 깨진 마음이 어떤것인지 네게 보여주겠다.” 이러한 상하고 깨진 마음은 황폐된 것들을 복구하고 절망스러운 때에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과 존귀를 드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합니다.

끊임없는 영적 싸움

Gary Wilkerson

우리는 왜 끊임없는 영적 싸움에 놓여져 있는 것일까요? 만화영화에서처럼, 한 어깨에는 마귀가 한 어깨에는 천사가 있어서 나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영적 싸움에 놓여져 있으나 만화영화에서 같은 고민은 사실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에 우리에게 놓여진 진짜 딜레마에 대하서 언급하였습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로마서 7: 14-15, 18).

바울은 얼버무리지 않고 직선적으로 그의 상태에 대하여 말합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라고 말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것이 바울이 생각하는 크리스천의 모습이었을까요? 그는 “여러분의 삶은 갈등으로 가득차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애굽의 굴욕을 몰아내며

Carter Conlon

미국 교회는 교회를 감싸고 있는 사회에 의해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타락한 사회의 신학은 수많은 하나님 백성의 신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새로운 한 세대가 부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지쳤고 무능력함에 진력이 났으며, 예수님의 이름이 발아래 짓밟히는 것을 더이상 묵인할 수 없는 사람들의 무리입니다.

주님은 그분의 백성을 부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희가 나의 죽음을 통해 너희에게 주는 그 생명을 상속받기를 원한다면, 너희는 죄로부터 떠나는 것을 선택해야만 한다. 너희는 이 타락한 사회의 일반적 관습을 행하는 것을 거부해야만 한다.” 지금은 또 다른 기적의 시간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일원으로 우리 각자를 초청하셨습니다. 우리는 약속의 땅으로 막 진입하려는 여호수아의 세대와 흡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애굽의 굴욕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명백히 승인될 때까지는 그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신뢰하는 마음

David Wilkerson

최근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게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제가 이전에는 결코 보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시편 22:4-5).

다윗은 누차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시편 11:1)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시편 25:2) 히브리어 어원으로 ‘신뢰’라는 단어는 “자신을 벼랑으로 떨어뜨리다”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뛰어내려!”라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아이가 아버지 말에 안심하고 순종하여, 자신의 몸을 던져 아버지 팔에 맡기는 어린아이의 믿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분 말씀으로 씻겨지다

David Wilkerson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죄를 덮어주는 보혈은 원하지만 정결케 하는 보혈은 원치 않습니다! 구약의 성막 의식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어떠한 동행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예를 제시해줍니다.

성막에는 희생 제물 동물들이 죽임을 당하는 바깥 뜰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사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 역시 정결케 하는 놋대야가 있었습니다. 어느 제사장도 씻지 않고는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교제할 수 없었습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놋대야를 비켜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놋대야는 말씀의 물에 씻겨짐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죄로 온통 범벅이 된 채로, 그리고 죄의 습관들이 그들 마음속 깊이 새겨진 채로, 성소로 돌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당당히 걸어 들어가 이렇게 호언장담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습니다.”

조명받기를 구하는 심령

David Wilkerson

한번은 제가 펜실베이니아에서 개최되었던 청소년 챌린지 컨퍼런스 (Teen Challenge Conference)를 마치고 뉴욕으로 먼 거리를 운전해 오는 도중이었는데, 주님께서 제 속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완전한 심령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한다. 나는 그것을 네게 보여주어, 네가 그것을 추구하기를 원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완전하며 순종적 자세로 그분 앞에서 행했던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헌신하셨음을 제 영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주께서 마음을 다 살피시고…” (역대상 28:9) 완전한 마음은 다윗으로 하여금 이렇게 부르짖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편 139: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