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받은자

Gary Wilkerson

요한복음 8장을 보면 간음하다 잡힌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비난받던 여인을 인정받는 사람으로 받아주십니다. 간음한 여인의 생명은 예수님 손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녀를 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받아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벼랑끝에 서 있는 우리를 가리키시며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내 것이라. 지금 너는 벼랑끝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중심에 서 있는 자라.”

새 계명

Carter Conlon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3-35).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놓고 하신 말씀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장면인지요.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놀라운 사랑의 표본이자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서로를 사랑하도록,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당신처럼 서로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자, 이 명령은 당시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명령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

David Wilkerson

얼마 전에, 한 청년이 타임스 스퀘어 교회의 기도 예배 도중에 울고 떨면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워싱턴 주에서 왔으며 우연히 예배에 참석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나가서 콘서트장으로 갔으나, 다시 그 콘서트장을 떠나 교회로 되돌아왔습니다. 지금 그는 기도를 원했고, "부모님이 크리스천입니까?"라고 저는 물었습니다. "네, 늘 저를 위해 기도하십니다."라고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이 청년이 교회에 들어온 것이 “우연”이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와의 만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강제적으로 하거나 애원하지 않았습니다. 의심할 필요도 없이 그는 예수님에 의해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일어난 것이 그의 걱정하는 부모님의 기도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마가복음 7장 31-37절을 보면 귀먹고 말 더듬는 자가 예수님께 온 이야기를 봅니다. 예수님은 그를 군중에서 따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막 7:34-35)

작은 누룩

David Wilkerson

바울은 갈라디아의 교회에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갈 5:7-9).

여기에서 바울이 얘기하는 것은 교리적인 믿음이나 신학에 대한 마음가짐입니다. 그는 묻습니다. "무엇이 당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복의 충만함으로 가는 데 걸림돌이 됩니까? 한때 당신은 너무나 잘했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기도하고 선한 일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인 것을 아는데 무언가가 이상합니다. 더는 자라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육에 의존하는 상황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의 향기를 더이상 맡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확신, 분명함, 판단력이 모두가 없어졌습니다. 무엇인가가 당신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확신

David Wilkerson

바울은 확신을 가지고 로마에 있는 교회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롬 15:29).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거룩한 확신이 있어서 이렇게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행 24:16).

요약해서 말하면 바울은 "주님 앞에서 내 삶은 다 열려 있다. 내 마음에 숨겨진 죄는 없고 이 사실에 대해 논쟁할 수도 없다. 주님의 축복은 나에게 늘 흐르는 계시여서, 내가 설교할 때 여러분은 인간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영리한 신학으로 가득 찬 설교를 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듣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여러분에게 들려주는 바로 그 말이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이 재물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좋은 건강과 이 땅에서의 자원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에서 오는 축복이라고 여겨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에서 더욱 큰 복을 얘기합니다. 그리스어 의미로 복은 “하나님의 칭찬”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채워짐

David Wilkerson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롬15:29)라고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썼습니다. 그들에게 "내가 여러분들을 만날 때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가 될 줄 의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의 말은 모든 신도가 알아야 할 무언가를 넌지시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에는 다양한 정도와 척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도는 이 목적이 되는 복의 충만함을 누립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복의 충만함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은 그 복의 약간 밖에는 누리지 못합니다.

에베소인을 향한 그의 편지에서 바울은 모두에게 이 복의 충만함을 구하라고 권합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4:7, 13, 3:19).

구경꾼

Gary Wilkerson

하나님 안의 가족으로서, 우리는 교회에 모여 예배하고 찬양하며 말씀 듣고 나눕니다. 하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려고 할 때 구경꾼으로 남아있기 쉽습니다. 종종 죄 안에 있는 사람을 볼 때 그들을 죄 밖으로 나오게 도와주기보다 그의 죄가 적발되기를 비밀스럽게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면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하며 “그럴 줄 알았어. 그 사람 사생활이 늘 좀 이상해 보이더라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할까요? 아마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이가 돌을 던질 만한 죄가 있습니다. 사실 여자를 부정하다고 고발하여 예수님 앞에 데려왔던 바리새인들은 아마 군중 속에서 아무나 끌고 나와 돌을 던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똑같은 일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목소리 없는 울음

David Wilkerson

마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 귀머거리를 치유하시기 전에 우리는 이런 구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마가복음 7:34). 여기서 탄식은 신음소리 또는 가청 가능한 탄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살짝 얼굴을 찡그리시며 마음으로부터 탄식하셨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물론 귀머거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이 탄식은 무엇을 의미하였을까요?

그 의미에 대한 많은 해설과 주석을 읽어봤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제게 말씀해주시는 것과 같은 해설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천국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영이 두가지 이유로 조용히 울고 계셨을것 같습니다. 첫번째는, 이 귀머거리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마음과 두번째로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 특히 청년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마음 때문에 우셨을 것 같습니다.

수화

David Wilkerson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마가복음 7:33). 예수님께서는 이 귀먹고 어눌한 자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아셨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를 만져주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만나고 발견한 그 무엇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직접 만나고 변화되는 경험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귀를 열어주시고 혀를 치유해 주기를 소망하였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수년간 믿고 섬겨왔다면,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 예수님과 초자연적인 만남을 가진 순간을 기억할때에 그가 당신을 만져주셨고 당신은 예수님의 터치를 받은 순간 알아채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의 경험으로 안 것이 아니고 설교자가 전하는 메세지로 안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당신 스스로 만나고 경험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예수님과의 교제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유일한 소망

David Wilkerson

마가복음 7장에 나오는 귀먹고 말을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 이 사람은 바울이 언급한 다음의 특징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디모데후서 4:3-4).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로마서 11:8).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사도행전 2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