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따르는 자들

David Wilkerson

하나님을 만나 변화 받는 과정은 매우 새롭고 특별한 일입니다. 우리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어쩔땐 감당치 못할 정도로 급작스럽습니다. 죄와 사망의 삶에서 그리스도 안의 생명으로 급히 옮겨지는 것은 매우 기이한 일입니다.

우리의 처음 신앙생활은 어린아이가 걸음을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의 첫걸음은 매우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엄마와 아빠가 “넌 할 수 있어. 이리 오렴!” 이라고 외칩니다. 아이는 비틀거리며 한걸음 두 걸음 내딛습니다. 그럼 부모들은 곧바로 아이를 껴안고 칭찬합니다. 아이의 형과 누나들도 잘했다 격려합니다. 아이는 모든 사람의 집중을 받고 이는 매우 신이 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곧 그 아이가 자라며 더이상 가족의 중심이 아닌 것을 느낍니다. 넘어지면 혼자 일어나야 하고 돌아다니며 온 집안을 엉망으로 만듭니다. 화분을 쓰러트리고 냄비들을 흩뜨려 놓고 옷들을 서랍에서 꺼냅니다. 그리고 혼나게 됩니다. 이제는 더이상 신나지만은 않습니다. 첫걸음 때는 그토록 친창과 격려를 해주었건만 이제는 모든게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매임 받아

Gary Wilkerson

우리가 살고있는 문화는 우리에게 가장 최고의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문화는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을 대한는 태도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모든 복을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선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중심은 하나님의 영광이지 우리의 욕심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상들을 엎으시며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요2:1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이처럼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모든 것들을 성전에서 없애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심으로우리 안에 이러한 방해물들을 없애시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울 공간을만드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가 다시 한 번 기도와 믿음과 승리의 전으로 변하길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돈 바꾸는 사람들을 내쫓으실 때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7)” 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진실한 열정을 보았습니다. 예수의 행동이 냉혹해 보일 수 있었지만 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실제로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장

David Wilkerson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5:7).

당신은 매일 지루하고 중복되는 일들은 되풀이합니다. 예를 들면, 주중에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같은 아침식사를 하고, 같은 길을 이용하여 출근합니다. 또 점심식사는 매일 같은 식당으로 가고, 집으로 가는 길 같은 커피숍에 들르고, 운전하는 동안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습니다.

우리의 영적 삶도 똑같아 질 수 있습니다. 주일 아침에, 교회에 가서 매주 같은 자리에 앉습니다. 같은 찬송을 부르고 심지어 매주 같은 기도를 합니다. 우리는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매일 하던 것보다 더 하게 되지 않는 것 같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며,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지만 더 이상 다양성이 없다. 수년 동안 똑 같은 일을 반복해왔지만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것 같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

David Wilkerson

당신은 지금, 당신을 성숙하게 하기 위하여 당신의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육체적 성장에 비유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육체가 영양분을 공급 받듯, 영혼도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2장 19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그러한 성장은 머리로부터 비롯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안에서 거하면서 예수님을 믿을수록, 예수님의 생명이 당신의 영혼을 끊임없이 공급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명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심지어 잠잘 때에도 당신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원천이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삶에서 어떤 일을 겪고 있든 어떤 기분이든 상관없이, 매일 신선한 생명을 공급해 주실 것 입니다.

더욱 풍성히 하여라

David Wilkerson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의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삶을 살고 있다고 격려해주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마땅히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지 우리에게서 받았으니”(데살로니가전서 4:1). 그러고는 이러한 권고를 추가하였습니다. “너희가 행하는 대로 더욱 풍성히 하여라”(4:1).

더욱 풍성히 하라는 의미는 아주 많이 증가시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온전한 복음의 말씀아래에서 자라나 단단한 반석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은혜 안에서 믿음, 지식 그리고 사랑이 증가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도 유사한 말을 전하였습니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찌니라”(고린도후서 8:7).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영이 너희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으니, 모든 면에서 너희가 가진 것 – 시간, 재정 그리고 재능 등-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믿음의 불씨를 다시 켜십시오

David Wilkerson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요한계시록 3:1).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이든 해줄 의향이 있는 선한 사람 일수도 있다. 이 세상과 교회 안에서나 좋은 평판과 명예를 갖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참 생명을 누리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네 삶 안에 사망의 요소가 침투하였다. 이 세상의 것으로 네가 더럽혀졌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나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3:4). 여기서 더럽혀졌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기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고를 주십니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3:2).

하나님의 성전

Gary Wilkerson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성령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고린도전서 6:19 참고). 어떤 것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을 빼앗아가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상을 엎으셨을 때(요한복음 2:13-17 참고), 예수님은 상인들의 장사판 만을 뒤엎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동물로 제사를 드려 하나님께 예배하는 종교적 관습에 안일한 사람들의 모습을 엎으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와 구원은 더 이상 양과 염소, 비둘기로 제사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죽음으로 완성될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David Wilkerson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이 어떤 위험에 처해있는지 자각하지 못합니다. 아마 이렇게 반발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도를 안한다고 해서 어때서? 그래도 보혈의 피로 씻기우고 용서 받고 천국에 가는 신자들인데. 믿음 생활이 약간 미적지근해진다고 위험할게 뭐가 있어?”

저는 하늘아버지께서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요구하는 이 바쁜시대를 이해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바쁜 일정에 휘말리게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생자 예수의 목숨과 바꾼 주님께 가는 통로를 거부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견고한 망대로 만드셨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든지 그에게 “달려가는” 사람만이 안전하게 피할 수 있습니다. (잠언 18장 10절 참조). 달려 들어가지 않으면 당신은 아직 문 밖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스라엘인들이 서 있었던 그 곳에 서 있지만 하나님은 더 이상 그 문에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문 안에 있습니다: 죄의 용서, 필요한 때의 자비, 극복하는 능력.

극복하는 삶으로 가는 길

David Wilkerson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때, 모든 사람들이 그분에게 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회당에서, 언덕에서 또 보트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기적과 이적을 행하시며 아픈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분은 연회에서 목소리를 높여 우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물이다. 나에게로 오라 그리고 내가 너의 목마른 영혼을 충족시켜 주겠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면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이 초대는 대부분 무시되어졌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향해 눈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가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마태복음 23장37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고 너희들에게 열려있다. 내가 너희에게 와서 치유받고 필요한 것을 받으라고 말해왔는데 너희는 오지 않는구나.”

그리스도의 영의 가장 큰 고통

David Wilkerson

그리스도의 영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일까요? 아마 그에게 갈 수 있는 완전하고 제한없는 통로를 받고도 나오지 않는 세대일 것입니다.

수세기에 걸쳐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축복의 날이 오기를 갈망하고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통로는 모세가 간절히 바랬던 바로 그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이 볼 수 있었지만 누릴 수는 없었던 바로 그것이고, 다니엘이 주님께 하루에 3번 기도하면서도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이 통로가 우리의 때에 열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를 위해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선물의 권리를 가진 우리는 그 가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문이 우리를 위해 열렸는데도 우리는 몇일이고 몇주고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이 무슨 죄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사신 이 통로를 무시하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것은 그의 보혈을 경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나아오기만 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것을 다 가질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계속 그 값비싼 선물을 무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