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영적 권위

David Wilkerson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력을 시각적이고 휘황찬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권위에 있어서는 결코 같은 의미로 볼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에게 영적 권위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베드로전서 3:4).

베드로가 사용한 온유함이라는 단어의 뜻은 상냥함, 온화함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안정함이라는 뜻은 확신 있고, 흔들리지 않는 의미를 갖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안에서 늘 평안한 마음을 뜻하는 것이며, 그러한 마음이 진정한 영적 권위를 갖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속사람

David Wilkerson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로마서 7:22).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린도후서 4:16).

그렇습니다. 바울이 기록한 것과 같이 우리 모두에게는 겉사람과 속사람이 있습니다. 겉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 앞에서 보이는 모습이고 속사람은 하나님께서만이 아시는 모습입니다. 속사람은 뚜렷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속사람을 끊임없이 더욱 강하여져 진정한 영적 권위를 얻을 수 있는 준비를 시키기 위하여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양면성을 우리에게 한 여인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화려한 옷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가장 최신 유행하는 머리모양을 갖추고 있습니다. 육신이 육신을 만족시키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지요.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베드로전서 3:3-4).

완전하신 하나님

Gary Wilkerson

100여년 전에 프랑스의 발명가는 동영상이라는 혁신적인 발명을 하였습니다. 그는 사진을 연속적으로 정리해서 밝은 불빛 앞에서 빠르게 움직이면 실제로 움직이는 듯한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발명가는 특별한 행사로 영화를 초연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고위층 관리들을 포함한 관객들은 기대에 가득 찬 채로 강당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역에 도착한 기차” 라는 50초 길이의 영화를 보였습니다. 짧은 영상이었지만 그것은 아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 영상에서는 기차가 카메라를 향하여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사람들이 그 영상을 보았을 때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영화를 보기 전 그 어떤 전후 사정을 모른 채 다가오는 기차의 영상을 보니 기차가 자신들을 치고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두 착시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는 그저 영상일 뿐이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온전히 맡기는 것

Nicky Cruz

\제 마음을 예수님께 드린 그 순간부터 저는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작은지 깨달았습니다. 세상에는 저보다 재능이 많고, 설교도 유창하게 잘하고, 신학적으로도 박식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완전히 주님의 선하심에 매진한 제 마음입니다. 종종 저는 주님을 너무 사랑하는 마음에 제 심장이 몸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이 느끼고는 합니다. 제 몸이 주님에 대한 제 경배의 마음을 담기에 부족하고, 제 어휘력으로는 제가 드릴 수 있는 예배의 깊이를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제 말로는 제 마음에서 느끼고 있는 사랑과 헌신을 공평하게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가끔은 주님에 대한 제 사랑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눈물이 날 때도 있습니다.

의의 공효

David Wilkerson

다윗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시 23:4). 원수가 목전에서 무엇을 던지든지 다윗의 속사람은 흔들리지 않고, 마음에 동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에 온전히 거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를 알기 때문에 원수의 거짓말을 더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시기 때문에 사단의 말을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 어려움이 폭풍이 와도, 사단이 격분해도, 원수가 사방에서 몰려와도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음의 목전에서도 나의 마음은 평안하다주님께서는 나의 안위를 위해 일하신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와 정반대로 절망에 떠는 크리스챤은 아무런 권위가 없습니다. 그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셨을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라고 생각만 합니다. 모든 능력의 원천들을 몰수당했으므로 그들의 삶은 혼돈과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심는 것에 거을렀기 때문에, 위기의 순간에 말씀에 의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적 권위를 얻는 것

David Wilkerson

제자들이 사단에 대적하지 못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오직 기도와 금식으로 대적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께서 저희 속사람을 변화시킬 시간을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주님은 저희 마음이 온전히 주님께 맞춰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과 정기적인 성찬이 없이는 어떤 권위도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교회, 가정 그리고 힘들어하는 자녀들에게서 사단을 내쫓을 수 있기를 바랍니까? 자녀 앞에서 말다툼 하고 싸우고 흉보면서 어떻게 주님의 영적 능력이 전해지기를 기대합니까? 나가서 술 마시고, 자녀들이 약을 하는 것을 알았을 때 벌컥 화를 내면서 어떻게 권위가 세워지기를 원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라고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4:30). 이와 같이 말할 수 없다면 여러분은 능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단은 여러분의 가정을 걷잡을 수 없게 할 것입니다.

오늘을 위한 능력

David Wilkerson

사도 베드로는 저희와 똑같이 살과 피로 지어졌지만, 사단을 물리치는 영적 권위를 행사했습니다. 성전 문에 있는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라고 하였더니 그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날 종교 지도자들은 베드로의 능력을 알아보고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4:7).

성경 어디에서도 이 능력이 오늘날 저희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나는 여태껏 너희를 도와주었다. 이제는 너희 혼자서 하거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어떤 하나님이 백성을 광야에서 필요할 때 힘을 주시고 그 어느 세대보다도 더 하나님이 필요한 이 마지막 때에 모른 체 하시겠습니까?

성경에 의하면 사단의 힘은 저희 날에 더 강해집니다: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 갔음이라 하더라" (계 12:12). 왜 방어할 힘도 없는 약한 교회를 공격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겠습니까? 그의 백성은 하나님의 신성한 권능을 잃어버린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적의 모든 능력을 넘어서

David Wilkerson

저는 오늘날의 교회가 영적 권위의 부재로 전면적인 위기에 처했다고 믿습니다. 저는 자녀들의 문제로 절망한 목사님이나 부모들의 전화를 꾸준히 받습니다. “제 아이가 약에 중독된 걸 알았는데 뭘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라고 애원합니다.

그 부모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상심에 빠져 진정한 도움을 줄 영적 권위자를 찾으려 필사적입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궁금합니다: 이분들의 집에는 영적인 권위가 어디에 있는가? 제 의견으로는 많은 부모가 그렇지 않은 데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집에서 누군가는 사단을 자녀에게서, 가정에서 쫓아낼 힘을 가져야만 합니다. 모든 고통받는 부모들에게 “자신부터 영적인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아이가 부모를 배제해도, 기도의 다락방에서 부모는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까

Gary Wilkerson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그 행하시는 치유의 역사와 기적들이 많은 무리의 마음을 끌었었습니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 . .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요 6:3, 5).

성경학자들은 이 무리를 대략 만에서 만오천 명 가량으로 추정합니다. 이 많은 인파가 몰리는 광경은 아마도 제자들에게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제자들이 맞는 사람을 따르고 있다는 것과 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검증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군중들이 몰리면서 제자들은 불가능한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6:5). 꿈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느껴보기도 전에 현실에 맞닥뜨리게 된 것입니다.

자원하여 처한 위험

Jim Cymbala

영적 세계에서는 우리가 자원하여 전쟁터 선두에서 싸우지 않는 이상 절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최대한의 잠재력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왕과 연합하여 그의 이름으로 그의 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는 한 우리는 어떠한 능력과 기름 부우심이 우리에게 가능한지 알 수 없다. 편한 곳에 앉아서 서로 성경을 논의하고, 현재 시대가 얼마나 타락했는지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관계없다. 그는 전쟁 가운데 우리를 만나신다. 우리가 싸워야 할 원수라는 대상이 있을 때 그는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역대상 11장 12~14절에 보면 엘르아살이란는 자가 다윗과 함께 블레셋을 상대로 전쟁에 나간다. “보리가 많이 난 밭이 있더라.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레서 도망하되” 라는 구절에서 보듯 적군은 엄청난 상대였다. 작은 접전이 아닌 더 강력한 적군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쟁이였다. 많은 이스라엘 군인들은 몰려오는 적군을 보고 도망치기까지 했다.